[경제학설사] 박제가의 북학의
- 최초 등록일
- 2004.06.19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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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1.연구목적
2.연구방법
3.연구구성
Ⅱ.박제가와 사회적 배경
1.박제가의 생애
2.후기 조선 사회의 모습
1)조선 후기의 농업의 변화
2)수공업의 변화
3)상업의 변화
3.북학의 구성
Ⅲ.북학의
1.박제가의 농업론
2.수공업
3.상공업
1)국내 상업론
2)대외 교역론
Ⅳ.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박제가 자는 차수, 호는 초정․정유․위항도인으로 밀양 박씨 우부승지 박평의 서자로 1750년 11월 5일에 한양에서 태어났다. 열한 살 때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며 자라났다. 그가 17세 되던 해에 덕수 이씨와 혼인을 하게 된다. 덕수 이씨는 충무공의 5대손인 이관상의 서녀였다. 그리고 이 시절에 자신의 문예활동에 큰 영향을 준 박지원과 이덕무, 유득공 등을 만났다.
1778년 정조 2년에는 사운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게 된다. 당시의 중국은 명 말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서양문물이 보급되고 건륭 황제의 성정 하에 사회가 안정되어 상품유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박제가는 약 3개월에 걸친 여행 기간 중 많은 명사들 이조원, 반정균등에게 새 학문을 배우고 귀국하여 국학의 내외편을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1779년 정조의 특별한 배려로 세 사람의 서얼 출신 학자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으로 출사 하였다. 그리고 가승지로도 임명되기도 하였다. 1792년에는 외직인 부여현감으로 부임하였고, 1799년에는 춘당대 무과 별시에 장원으로 뽑혀, 오위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영평현령으로 부임하였고 1798년 『북학의』진소본을 작성하고 1801년 순조 1년에 사은사 수행을 네 번째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동남성문의 흉서사건에 사돈 윤가기가 조모자로 지목되어 연좌로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805년 3월에 대비의 특명으로 귀양살이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왔고, 그해 4월 20일에 4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참고 자료
박인수 「박제가의 북학사상 연구」1994
정연미 「박제가의 경제개혁론 연구」1993
김병하 『한국경제경영사상사』 (1989 계명대학교출판부)
김종수 『뿌리 깊은 하국사 샘이 깊은 한국사 5』
(2002, 솔출판사)
박제가 이익성역 『북학의』(1992 한길사)
박제가 안대회역 『궁핍한 날의 벗』(2000 태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