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사] 도교와 도참사상
- 최초 등록일
- 2004.06.09
- 최종 저작일
- 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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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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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왜 고려는 도교와 풍수·도참사상을 선택했었나?
본론
(1) 도교
① 한국의 도교
② 고려시대의 도교
- 재초와 습속
1) 고려초기의 도교
2) 고려중기의 도교
·수경신신앙
3) 고려후기의 도교
(2) 풍수도참사상
① 나말여초의 왕건과 결부된 풍수도참사상
② 훈요십조에 나타난 풍수도참사상
③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풍수도참사상
④ 그 밖의 고려의 정치적 풍수도참사상의 특징
결론 - 대단원 정리
본문내용
한국사에 있어서 道敎는 佛敎·儒敎와 더불어 三敎로 병칭되며 정통사상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러한 道敎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高麗時代라고 할 수 있다. 佛敎가 그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귀신·영성(靈星)·산신(山神), 그리고 무속(巫俗)과 더불어 圖讖思想이 병존하여 모든 것이 기복(祈福)종교의 현상을 띄는 것이 이 시대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道敎 역시 여러 민간신앙과 잡유(雜)되면서 佛敎 圖讖思想과 함께 하여 現世利益을 희구하는 禳災祈福의 祈祝행사가 성해, 그 풍습이 민간생활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또한 風水地理設은 圖讖思想과 혼유하여 高麗初期부터 朝鮮의 개창까지 그 영향을 두루 미쳤으며 高麗時代에는 太祖의 훈요십조로부터 高麗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風水地理說에 의한 西京吉地設은 西京 遷都와 북진 정책 추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으며, 開經 세력과 西京 세력의 政治 싸움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高麗 중기에는 북진 정책의 퇴색과 아울러, 새로 南京吉地設이 대두하여 高麗末까지 政治的으로 영향을 끼쳤다. 佛敎와 결합되어 민간생활을 좌우하였으며 국가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高麗時代의 地理圖讖思想은 風水地理設과 圖讖思想으로 나누어 볼 수 있지만 흔히 혼합되어 나타났다. 또 주로 政治的·사회적 혼란이 가중될 때 융성하였다. 高麗時代는 政治가의 권력은 風水家의 권위를 필요로 하였고, 반대로 風水家의 권위는 政治가의 권력을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견지에서 羅襪 麗初의 政治와 風水地理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인문 지리학적 성격을 가진 風水地理思想은 왕이나 지배세력들에 의하여 자신의 政治的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많이 이용되었다. 圖讖思想 역시 政治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성격이 짙었다. 경주에서 開經으로 遷都하는 때는 역성혁명이 뒤따랐다는 점에서 관념적인 면보다 정책적인 실리, 또는 지정학적인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합리화하려는 노력이 風水地理說의 적극적 수용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風水思想은 高麗 太祖의 혁명을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고 다시 후세에 내려올수록 신비화의 길을 밟아 드디어는 圖讖思想과도 결부되어 불안한 세태를 극복하는 비술로까지 믿게 되었다. 高麗 初期는 건국·통일의 시대인 만큼 거기에 관한 圖讖設이 자연 유행하였고 중기부터는 태평과 동란이 번갈아 계속되는 동안 귀족의 발호 속에 왕권은 쇠퇴하였다.
참고 자료
·朴龍雲, 『高麗時代史』(一志社, 1987)
·李基白.閔賢九 編著, 『史料로 본 韓國文化史』<高麗篇>, (一志社, 1984)
·李丙燾,『高麗時代의 硏究』(亞世亞文化社, 1980)
·柳炳德,「高麗時代 宗敎思想과 그 特性」(『韓國學入門』, 학술원, 1983)
·車柱環,「高麗의 道敎思想」(『韓國의 道敎思想』, 同和出版公社,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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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銀容,「高麗時代의 道敎와 佛敎」(『韓國宗敎』8, 1983)
·國史編纂委員會, 『韓國史』16권, 高麗 前期의 宗敎와 思想 (國史編纂委員會,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