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 최초 등록일
- 2004.05.27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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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1. 결정적 패배, 대륙의 상실, 추락의 역사
2. 지방정부와 중앙정부: 전한왕조와 국민당정권
1) 국민당정권의 천하가 성립되는 과정과 배경
2) 남경국민정부의 수립과 끝나지 않는 전쟁
3) 이루지 못한 지방군벌의 타파와 국민당정권의 부담
4) 군벌타파의 실패는 장개석의 패배에 어떻게 기여했는가
3. 항일전쟁기와 종전 이후의 경제
1) 동남지방의 경제력과 장개석
2) 중일전쟁과 국민당정권, 국부군의 경제적 시련
3) 징세에 있어서의 파탄과 민심이반
4) 인력동원, 군량미확보: 점증하는 경제적 부담
5) 대기근과 저항
6) 종전 이후: 전부면제책이 초래한 결과
7) 재정, 경제의 파탄과 장개석의 패배
4. 항일전쟁과 국민정부군
1) 국부군과 그들의 적들
2) 중일전쟁의 개전과 국부군 전력
3) 1938년에서 진주만기습까지: 소모전과 국부군 전력의 약화
4) 미일개전으로 인한 변화: 국부군 사기의 저하
5) 1944년 대륙 타통 작전
6) 국부군의 장성과 하급장교, 그리고 최고지도자
5. 국부군의 공산군과의 싸움
1) 대륙의 상실: 미국의 책임?
2) 장개석의 패전에 대한 반응과 분석
3) 장강 도하 작전
6. 결론: 다시,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본문내용
국부군이 수많은 불리한 요인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37년 개전 이래 1년간 급속도로 일본의 팽창이 이루어진 이후 전선은 고착되고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는 중국공산당에서 주장하듯이 홍군이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여 일본군이 더 이상 팽창할 여력이 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국부군이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한 것은 더욱 아니다), 국민정부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의 러시아처럼 공간을 내주면서 시간을 벌었기 때문이었다. 해안의 주요 도시들을 휩쓸며 국민정부의 평시 수도였던 남경을 장악한 일본군은 1938년 10월 무한과 광주를 점령한 것을 마지막으로 진격이 멈추었다. 이 때부터 국부군은 근대적인 일본군이 그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사천성으로의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 대항하였으므로 일본군은 더 이상 진격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함포사격은 물론이거니와, 포격의 효과도 발휘되기 어렵고, 공군의 지원 폭격조차 시원치 않은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일본의 전격전이 실패한 것은 확실하지만, 장개석의 성공인지도 또한 의문이다. 상해에서는 제19로군이 영웅적인 저항을 함으로써 일본군을 놀라게 하였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장개석은 중앙군을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정예군을 추가 투입하여 상해 공방전에 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국 일본군의 배후 습격 전략에 의하여 상해를 지키던 국부군은 포위되다시피 하여 궤멸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상해도 결국 함락되었던 것이다. 정예의 병력과 (특히) 장개석 자신 휘하의 중앙군이 대거 손실됨으로써 이것은 또다른 정치적 파장을 야기하게 되었음은 상술한 바와 같다.
참고 자료
로이드 E. 이스트만 저, 민두기 역,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 지식산업사, 2000
요코야마 히로아키 저, 박종현 역, "중화민국사", 신서원, 2000
에드가 스노우 저, 홍수원·안양노·신홍범 역, "중국의 붉은 별", 두레출판사, 1995
리 즈수이 저, 손풍삼 역, "모택동의 사생활", 고려원,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