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의 국내통치론
- 최초 등록일
- 2003.12.17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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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화사상의 국내통치론 및 사회경제론
1)초기개화사상
2)후기개화파-급진,온건개화파
○위정척사운동의 국내통치론 및 사회경제론
1.제 1기
ꊱ 노사 기정진(1798~1879)
ꊲ 화서 이항로(1792~1868)
2.제 2기 (1876년)
3.제 3기
4. 한계점 및 의의
본문내용
2. 후기 개화파
- 1976년 개화파는 점차 의견과 노선의 대립이 생겨 조선사회가 적극적이고도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화되어야 한다는 ꡐ급진개화파와 ꡑ점진적으로 개화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ꡐ온건개화파ꡑ의 두 파로 나뉘어지게 된다. ‘개화당’, ‘독립당’ 이라고도 불리는 급진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등의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따르려 하였고, ‘사대당’, ‘수구당’ 이라 불리는 온건개화파는 김윤식, 어윤중, 김홍집, 민영익 등에 의해 청에 대한 종속을 인정하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한 양무론적․ 점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대체로 일찍이 개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그 수용을 주장한 사람들은 급진개화파 계열이었으나, 정부요직에 있으면서 실제로 개화정책을 추진한 사람들은 온건개화파였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은 개화사상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먼저, 정치적인 개혁으로 1880년 봉건지배의 부패를 일소하고 무력해진 행정기관들의 기능과 역할을 높이기 위한 중요한 조치의 하나로 통리기무아문을 창설하고, 1881년 신식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며, 5군영을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의 2영으로 개편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