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 안민가
- 최초 등록일
- 2003.12.16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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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시에 활용했던 자료로
여러가지 논문들을 비교 고찰한 자료입니다.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목차
Ⅰ.들어가며
Ⅱ.논문요약
1. 안민가 내용에 관한 논문
2. 안민가 창작 동기와 관련된 논문
Ⅲ.나오며
본문내용
이기백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경덕왕 때의 정치사회 내에는 몇 개의 파벌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파벌이라 왕을 따르는 왕당파와 왕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이에 반기를 든 반왕당파, 이상 두 가지의 그룹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성격의 파벌은 왕 16년에 九州를 비롯한 지방군현의 명칭을, 왕 18년 중앙관부의 명칭을 漢式으로 고친 것을 계기로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고 한다. 왕이 지방군현과 중앙관부의 명칭을 한식으로 바꾸려 한 의도는 질서가 정연한 중국의 제도를 모방함으로써 전제주의적 정치체제를 굳히려고 한데에도 있었고, 이러한 왕의 정책이 귀족들의 반감과 異意를 삼으로 해서 신라의 정치사회는 자연 두 개의 파벌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경덕왕은 中代를 대표하는 전제군주의 말기 인물로서 그의 생각으로는 전제주의적인 중대의 왕통이 자기 다음대에도 계속 이어질 것을 바라는 것이었고, 이에 따라 전술한 바 두 번에 걸쳐서 지방 군현과 중앙관부 명칭의 개혁을 단행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의 이러한 희망과 의도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는데 그것은 경덕왕의 아들인 36대 혜공왕 때에 접어들자 신라 하대적인 요소와 세력이 실권을 장악함은 물론 중대적인 세력의 계승자로 표면에 나타난 혜공왕이 그 역사적 소임을 계승 완수치 못하고 모반한 반대파의 무리에 의하여 피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이러한 역사적 사상을 상고해 불 때 경덕왕은 미리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예측하고 전제주의적인 정치적 요새를 확고히 구축하려 했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