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사론] 국악사론(조선후기의 아악,향악,당악)
- 최초 등록일
- 2003.11.26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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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의 국악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조선 후기의 아악·향악·당악
2. 조선후기의 고취악과 종묘제례악
3. 정악의 출현과 성장
Ⅲ. 결론
본문내용
Ⅱ. 본론
1. 조선 후기의 아악·향악·당악
조선 전기의 음악 문화는 아악, 그리고 향악과 당악이라는 두 주류로 구분되었다. 실제로 장악원 소속의 악생이 좌방의 위치에 있었던 아악연주를 담당하였고 우방 위치에 두었던 향악과 당악연주를 악공들이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15세기 후반에 정비된 법률에 악공과 악생의 사회적 신분이 규정되었으므로, 조선 전기에 세워진 장악원의 전통이 조선 후기까지 계승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러나 17세기 전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엄청난 국가적 시련을 두 번씩이나 겪으면서 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너무 비참하게 파괴 또는 혼란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씩이나 국란을 지내면서 음악활동을 관장했던 장악원의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먼저 살펴보겠다.
1) 장악원의 실태
17세기 전후로 네 차례의 크고 작은 전란이 있었다.
조선시대 전통음악의 본산지였던 장악원도 이러한 국란의 좌중에서 예외일 순 없었으니 장악원의 실태에 대한 서술의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정축(1637) 5월 23일, 장악원이 예종에 올린 첩정에 이르기를, "비변사의 사목에 의하면, '악공과 악생들은 봄과 가을에 한번씩 입번하여 습악한다'라고 하였거니와, 병자호란을 겪은후 남은 악기를 모아서 정돈해 보니, 놋쇠로 된 편종과 석경으로 된 편경을 제외하고 실·대나무·가죽·나무로 만든 악기들은 벌반이 넘게 부서졌습니다. 앞 으로 다가올 습악이 멀지 않았는데 한꺼번에 모든 악기를 갖추기 어렵습니다. 늙은 악사에게 물어보니, '임진왜란 이후 악기들이 산실되고 남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지방에 있는 기관들로 하여금 약간의 악기를 모아서 서울로 보내도록 함으로써 습악 때 사용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도 고사에 따라서 경상도와 전라도에 있는 기관으 로 하여금 장고·비파·거문고·가야고·아쟁·해금·무고 등이 있는 곳을 찾아서 기관들에게 분담시켜 가을 습 악에 맞추어서 서울로 보내도록 하오되, 약·적·관·지의 제조에 쓰일 대나무를 또한 분담시켜 잘 골라서 서울 로 보내도록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음악통사』. 송방송. 서울: 일조각. 2001
『국악통론』. 서한번. 서울: 태림출판사.1997
『국악개론』. 장사훈, 한만영. 서울: 서울대학교출판사.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