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옛길

등록일 2003.11.16 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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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새벽에 일어나면 싸리비 챙겨들고 앞마당 쓰는 일이 그 날의 시작이었다. 대문 열고 동구 밖 한길가의 모정(茅亭)까지 훤히 비질자국을 남겨야 직성이 풀렸던 우리네였다. 견우 직녀가 만난다는 칠월칠석은 양력으로 9월 말께다. 장마가 그치고 몇 차례 태풍도 어지간히 지나간 때다. 고갯길은 무너져내린 흙더미로 쌓이고 곳곳에 빗물이 골을 패고 찢어진 나뭇가지로 길 꼴이 말이 아니다. 이날 재 아래 양쪽마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온동리가 모여 구부야 굽이굽이 고갯길 오르고 치우고 메우며 보수공사를 한다. 만나는 장소는 고갯마루 서낭당이다. 차려온 음식을 산신님에게 바치고 굿마당 벌이고 잔치로 흥겹다. 내려오는 길목에서 다시 살펴 다독이면 재밑 동리의 칠석행사는 끝난다. 고갯길이 훤히 뚫려야 재밑 동리도 편하다는 생각에서다. 우리네 옛길은 이렇게 열린 마음에서 유지되었다.
우리 민족이 생각하는 훌륭한 길이란 외형적으로 웅장한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좋은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나라의 옛 길은 대제국의 길처럼 넓지 못했고, 포장이 안된 상태였으며, 노변의 시설도 웅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은 반드시 필요한 곳에 만들었고, 노폭과 노면은 당시의 사회 및 경제사정에 맞추어 설계, 건설되었다. 다시 말하면 토양침식이 심한 자연조건을 고려하여 우리 조상들은 소박한 길을 만들어 이를 잘 보수, 관리함으로써 길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신라는 서기 156년 아달라(阿達羅)왕 3년에 문경(聞慶)의 계립령(鷄立嶺)을 개설하여 한강 유역의 중부권과 낙동강 유역의 영남권을 연결하는 대동맥을 마련하였고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성을 중심으로 이 계립령을 포함하여 전국에 X자 형태의 대로를 구축하였다.
중앙집권체제였던 조선시대 국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9개가 있었다. 국도라 해도 물론 포장도 없는 진흙길이고, 고갯길은 수레도 못 다니고 말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도보교통로였다. 그러나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나 춘향전의 이도령처럼 지방으로 가는 관리들, 그리고 5일장을 돌아다니는 장사꾼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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