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입헌국가 형성 과정
- 최초 등록일
- 2003.11.04
- 최종 저작일
- 2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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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제목마다 설명이 10줄 안팎으로 되어있습니다.
일본의 1879~1890 년도까지의
사회, 경제 등 전반적인 내용이구요
잘못된 책들과 달리 객관적이고 전문적인 책 보고
정리했는데 일본근대사 전공하신 교수님께서
정리 잘했다고 해주셨습니다. 헌법내용은 조금 틀렸다고하셨는데 수정 못했습니다.
목차
-오오꾸마 재정과 경제 위기
-자유민권운동의 고양
-1881년 정변
-류우뀨우 문제
-마쯔까따 디플레이션
-민권운동의 쇠퇴
-임오군란과 군비확장계획의 개시
-거문도 사건과 군비확장계획의 수정
-기업의 발흥
-군인 칙유와 내각제
-메이지 헌법의 제정
-조약개정문제
-대동단결운동
-도시와 저널리즘
-농촌과 근대화
-근대의 천황제
본문내용
1. 자유민권 운동과 1881 정변
① 오오꾸마 재정과 경제 위기
메이지 정부는 오오꾸마 재정 아래 적극적인 식산정책을 전개하기 위하여 불환 지폐를 발행해 왔다. 하지만 1. 서남전쟁의 군비조달을 위한 불환지폐의 남발, 2. 코꾸리쯔은행 조례개정에 따른 불환은행권의 증가, 3. 정부의 적극재정에 의해 1879년에 인플레이션이 진행했다.지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는 상승하고 인플레이션이 정부의 금고가 감소하게 되는 재정 위기로까지 이어지자 지출삭감과 증세로 재정잉여를 창출함으로서 불환지폐를 없앤다는 방침이 결정되어 적극노선에서 긴축노선으로 재정을 전환하였다.
② 자유민권운동의 고양
서남전쟁 중에 카따오까 켕끼찌 는 정부를 통렬하게 탄핵한 의견서를 천황에게 제출하려고 했다. 이 의견서가 정부에 의해 접수를 거부당하자 카따오까는 이것을 인쇄 공표하여 민중에게 알렸다. 이것을 계기로 자금난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있던 아이꼬꾸샤 가 78년에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 자유민권운동도 부흥하기 시작했다. 호농층이 이끄는 민권운동과 반 정부파, 아이꼬꾸샤가 가담해 총 88만 7천여명의 대표 114명이 참가해 국회개선을 당면 과제로 하고 1880년 아이꼬꾸샤 제4회대회에서 이름을 국회기성동맹 이라고 고친 다음 국회개선을 천황에게 청원하였다.
이처럽 자유민권운동이 고양된 원인은 1. 다수의 호농까지 참가층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호농은 유신 이후의 개화정책에 자극을 받아 국정참가를 요구하게 되었고 서남전쟁이후의 인플레이션은 지조의 실질부담을 감소하고 쌀값도 인상되어 호농층에게 호황을 가져왔다. 이러한 호황은 국정참가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비용이 드는 정치운동에 참가하게 만드는 경제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2. 저널리즘의 발달과 도시지식인의 활동이다. 이 시기는 언론기관이 만들어내는 여론이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언론기관의 담당자는 도시의 지식인들이었고 반정부의 입장에서 국회의 개설을 요구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