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무적함대와 프랜시스 드레이크
- 최초 등록일
- 2003.10.23
- 최종 저작일
- 2003.10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스페인과 영국의 운명을 바꿔 놓았던 해전에 대한 레포트.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대적인 배경과 진행 과정, 파급효과 등으로 기술되어 있음.
목차
없음
본문내용
무적함대(Armada Invincible)란 명칭은 영국인들이 에스파냐의 해군력에 대한 두려움에서 붙인 이름이었고, 에스파냐 인들은 신으로부터 ꡐ축복을 받은 함대ꡑ(Armada Felicisima)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서기 1588년, 영국은 최강의 에스파냐 무적함대와 도버해협에서 맞붙어 승리를 거머쥔다. 그 이후 에스파냐의 막강했던 국력은 점차 줄어들어 결국에는 바다의 모든 패권을 영국에게 건네주게 되었고, 세계사의 무대에서 차츰 멀어져 가는 계기가 되었다. 비로소 영국의 해상 왕국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으며, 자유로운 해상 활동은 영국에게 많은 식민지와 부(富)를 가져다 주었다. 그것은 영국의 근대화 - 내지 산업화 - 의 기틀이 되었고 현재의 영연방 (British Common- wealth) 을 있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에스파냐와 영국이 바다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 무적함대와 드레이크 제독의 도버해협 해전이야말로 두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결정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이 없고, 무엇보다도 현재의 영국의 위상과 영어문화권의 형성, 정치-문화적인 모습 등에서의 큰 틀을 형성시키는데 시발점이 된 사건으로서도 큰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
펠리페 2세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카톨릭에 입각한 종교적 전제정을 실시하였고, 해외 식민지 확장에도 노력하였다. 그 결과 1541년부터 진행된 필리핀 제도에 대한 정복을 감행하여 1571년 마닐라 시를 건설하였다. 해상의 패권을 거의 장악한 에스파냐는 영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1554년 1월 카톨릭 신자였던 영국의 메리 튜더와 결혼하여 영국 내에서 카톨릭 복교(復敎)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메리 여왕이 재위 5년만인 1558년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신교도였던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였다.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신교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청혼하였으나, 엘리자베스는 “나는 이미 국가와 결혼했다” 는 구실을 들어 펠리페 2세의 혼인요청을 거절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영국에서 1586년 메리 스튜어트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세력이 신교도인 엘리자베스 여왕을 폐위시키려는 이른바 바빙톤 음모 사건(Barbington's Plot)을 일으켰다. 이에 엘리자베스는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하게 되고, 에스파냐는 전통적인 카톨릭 국가였으므로 영국과 에스파냐간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