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현대사] 중일전쟁

등록일 2003.10.16 한글 (hwp) | 4페이지 | 가격 500원

목차

1. 노구교(盧溝橋) 사건과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
2. 전선의 확대와 국공합작(國共合作)의 붕괴
3. 항일전의 승리

본문내용

1. 노구교(盧溝橋) 사건과 남경대학살(南京大虐殺)

1937년 7월 7일 오후 10시 40분 북경서남족 10여킬로미터 떨어진 영정하(永定河)에 걸려있는 노구교(루거우차오: 盧溝橋)의 동쪽편 완평현성(宛平縣城) 북쪽의 황무지에서 야간훈련 중인 일본군의 한 부대를 향해 현성(縣城) 및 현성 반대쪽인 용왕묘(龍王廟)부근으로부터 몇 십발의 총알이 날아왔다. 일본군은 곧바로 응전태세에 들어가, 다음날 8일 새벽, 완평현성을 폭격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어 9일 본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총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동안 일본의 지나주둔군 특무기간과 천진(天津)시장 장자충(張自忠)사이에 가까스로 정전협정이 성립되어, 소규모의 충돌은 있었지만 9일 중에는 거의 사태가 수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지의 노력에도 아랑곳 없이 도쿄에서 11일 오전, 당시 고노에(近衛)내각은 각의에서 일본 본토로부터 3개사단, 조선으로부터의 1개사단, 만주로부터 2개여단을 파견한다는 강경방침을 서둘러 승인했다.
한편 7월 17일 장개석 군사위원장은 강서성 여산에서 성명을 발표하고(공표는 19일), 노구교를 잃으면 고도 북평이 제 2의 심양이 되고, 그렇다면 수도 남경도 북평의 운명을 걷지 않을 수 없으니 노구교 사건의 해결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이것이 최후의 경계이다라고 발표하였다.
7월 27일, 고노에 내각은 한 때 연기시켰던 일본 본토의 3개 사단 파병을 결정하고 천황의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 28일, 현지 일본군은 천진·북경을 중심으로 전면공격을 개시하여, 30일에는 영정하 이북의 북경·천진 일대가 거의 일본군에 떨어졌다.
8월전쟁은 다시 상해로 확산되었다. 그것은 이전 상해사변의 경우와 거의 똑같은 진행과정이었다. 화북에서 총공격이 시작된 7월 28일, 일본정부는 전면전쟁을 예측하고 양자강 유역의 거류 일본인 철수를 지령했다. 8월 9일 저녁 상해에서 이른아 오오야마(大山)사건이 터졌다. 해군대위 오요야마(大山勇夫)가 시내의 상황을 정찰하던 중 중국보안대에 의해 사살당한 것이다. 11월, 일본측은 곧바고 군함을 증파했다. 13일, 내각은 2개 사단의 상해 파견을 결정했다.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13일 저녁부터 중·일 양군 사이에 전투가 확대되었다. 14일, 대북(臺北)에 있던 해군항공대가 대만해협을 넘어 항주(杭州)·광덕(光德) 두 비행장을 폭격, 다음날 15일 나가사끼에서 날아온 비행기는 국민당의 수도 남경을 폭격했다. 중일간의 무력충돌은 대륙전체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북경·천진지구에서 일본군의 총공격이 시작된 7월 28일의 이튿날 장개석은 항전담화를 거듭 발표하고, 이어서 31일 심균유(沈鈞儒)·장내기(章乃器) 등<항일7군자>를 석방했다. 전쟁이 상해로 번져간 8월 14일, 국민정부는 마침내 <항일자위선언>을 발표하고 국방최고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임전태세에 들어갔다.

참고 자료

佐伯有一, 『中國現代史』 吳相勳 譯, 한길사, 1980
최옥자, 『中國近現代史』 일월서각, 1984
유신순, 『만주사변기의 중일외교사』 고려원, 1994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최근 구매한 회원 학교정보 보기
      1.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수와 학교정보이며
         구매한 본인의 구매정보도 함께 표시됩니다.
      2. 매시 정각마다 업데이트 됩니다. (02:00 ~ 21:00)
      3. 구매자의 학교정보가 없는 경우 기타로 표시됩니다.
      최근 본 자료더보기
      추천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