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와 전설
- 최초 등록일
- 2003.10.07
- 최종 저작일
- 2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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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사하구의 지명유래
괴정동(槐亭洞)
장림동 (長林洞)
☺ 경상남도 함안군의 지명유래와 전설
지명유래 - 갈마산(渴馬山)
전설 - 파수(巴水)곶감에 얽힌 전설(傳說)
본문내용
☺ 사하구의 지명유래
괴정동(槐亭洞)
괴정동(槐亭洞)은 승학산의 서쪽 능선이 마을 뒤를 병풍처럼 둘러져서 세찬 북풍과 낙동강 강바람을 막아 주고, 동쪽으로 시약산(蒔藥山)이 솟아 있고, 남쪽에는 금티산(金峙山)이 솟아 그 줄기가 서쪽으로 나즈막한 구릉(丘陵)을 이루어 해풍(海風)을 막아 주는 방파제 구실을 하고 있다. 새리골(세리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괴정천(槐亭川)을 이루어 괴정촌을 반월형(半月形)으로 흘러 이 마을을 윤택하게 하고, 하단 포구로 흘러 들어간다. 따라서, 괴정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하나의 분지(盆地)를 형성하고 있다.
괴정(槐亭)의 지명(地名)은 팔정자에 얽힌 사연이 있는 회화나무(槐木)에서 유래된다. 수령이 600년이 넘는 이 나무는 가렴주구에 혈안이 된 포악한 다대포 첨사의 이야기와 동래부사의 벌목령 등 많은 전설을 안고 있으며, 괴목(槐木)에서 마을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괴정 1동을「고분들」․「본동」이라 불렀고, 희망촌(괴정4동)을「말골」․「마하곡」․「소태미」라 하였다. 6․25사변 때 피난민들이 살던 보수천변 판자촌과 동광동 판자촌 화재 이재민들이 이사하여 새로된 마을이 괴정3동에 있는「신촌(新村)」이다. 또, 신촌 건너편 북쪽 산기슭에 간이 주택촌이 들어서서「양지(陽地)」마을을 형성하였고, 서대신동으로 넘어 가는 괴정동 대티(大峙)고개 밑에 있는 마을을 대티동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마을들의 명칭을 종합하면, 괴정동에는 곳곳에 옛부터 촌락을 형성하고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괴정동은 지리적으로 사람이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들이 마을을 일구워 살았다. 괴정분지에서 농경(農耕)에 종사하고, 동쪽 구릉을 넘어 감천 앞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아랫머리 산줄기를 돌면 조개와 물고기가 수없이 많은 낙동강 포구에 이르고, 배고개를 넘으면 신평 너른 들과 강가에 다다랐으니, 그 당시 식생활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
뿐만 아니라, 신평동으로 넘어가는「삼밭골」에서 삼농사를 지어 옷을 만들어 입었고, 하단 갈밭에서 거두어 들이는 갈꽃은 솜의 역할을 하여서 추위를 막아 주었다. 실제로 괴정동 패총(貝塚)에서 실을 꾀는데 사용한 방추자(紡錘車) 두 점이 나왔다. 그리고, 이 병도박사도 갈꽃이 면재배(綿裁培) 이전에는 솜의 역할을 대신했고, 명주가 나온 뒤에도 가난한 백성들은 갈꽃을 삼베옷 사이에 넣어 겨울을 지냈다고 한국사(韓國史)에 썼다.
괴정동에서 선사유적(先史遺蹟)과 유물(遺物)이 발견된 지점은 지금 장평 중학교 교문옆 길가와 대티(大峙)로 올라가는 옛길 입구 즉 신동 교역회사 공장뒤편의 주택가, 그리고 지금 괴정(槐亭)초등학교 남쪽 길건너 냇가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無文土器)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