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사] 갑오년에 일어난 사건

등록일 2003.09.28 한글 (hwp) | 12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1. 동학 농민 봉기 1
가.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결말 1
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배경 4
다. 동학농민운동의 지향점 4
라.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6

2. 청일전쟁 7
가. 청일전쟁의 시대적 배경 7
나. 청일전쟁의 경과 8
다. 청일전쟁의 결과로 이후 전개된 역사적 상황 9

3. 갑오개혁 10
가. 갑오개혁의 배경 10
나. 갑오개혁의 내용 11
다. 갑오개혁의 역사적 의의 12

본문내용

1. 동학 농민 봉기
1.1.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결말
곡창지대인 전라도는 개항 이후 근대화정책으로 재정이 쪼들린 중앙정부와 수령의 탐학을 가장 심하게 입었고, 쌀수출과 관련하여 일본상인들의 침탈도 다른 지역에 비하여 컸다. 특히 중앙정부와 수령의 수세와 균전세의 징수, 전운의 폐단 등 각종 억울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래서 중앙정부와 수령, 그리고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남달리 강하여 언제라도 폭동이 일어날 강경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러한 전라도 농민의 강경한 기류에 불을 붙여 놓은 것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이었다. 그는 만석보의 수세를 강제 징수하고,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고 1천여 냥의 돈을 사취하는 등 온갖 탐학을 일삼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고부 접주 전봉준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고부관아와 전주감영을 찾아가서 폐정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1894년 2월, 전봉준은 1천여명의 농민을 이끌고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아전들을 처단하고 양곡을 몰수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으며, 무기를 탈취하였다.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정부에 대해서 조병갑의 학정을 시정할 것과 외국 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 13개조의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이에 놀란 전라감사 김문현이 조정에 이 사실을 보고하니 정부에서는 조병갑을 파면하고, 새로 용안현감인 박원명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게 했다. 그런데 박원명은 광주사람으로 이 지방의 실정을 잘 아는 처지라 농민을 위로하면서 사태를 원만하게 수습했다. 그러나 뒤이어 도착한 안핵사(사태수습책임자) 이용태는 이 사건을 동학인의 소행으로만 돌리고 그들을 색출․탄압하는데 급급하였다. 이에 격분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1894년 4월 ‘보국안민’을 위해 봉기하라는 통문을 사방에 보내 8천명의 대오를 구성하여 조직적인 항거에 나섰다. 대장에 전봉준, 총관령에 손화중․김개남, 총참모에 오지영 등 지휘부는 대개 동학인들이 맡았으나 대부분의 참여자는 일반농민들이었다. 동학의 교단조직이 농민군의 동원과 규율에 이용된 것이다. 그들은 일본, 서양 그리고 특권층을 몰아내고 이상적인 왕정을 세우기 위해 싸울 것을 천명하였으며, 노란 깃발을 표지로 내걸고 죽창과 곤봉으로 무장하였다.

참고 자료

• 박종근, {청일전쟁과 조선}, 청목서점, 1982
• 유영익,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 이상식(편저), {동학농민혁명과 광주․전남}, 광주․전남 동학농민혁명 100주 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1994
•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저), {동학농민혁명의 지역적 전개와 사회변동}, 새길, 1995
• http://uniweb.unitel.co.kr:8083/class/history/lesson/main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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