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반데로에 VS 르꼬르뷔제

등록일 2003.09.22 한글 (hwp) | 5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미스반데로에
르꼬르뷔제

본문내용

Mies van der Rohe

[ 독일시대 ]

근대 이후 대부분의 건축가와 달리, 미스는 생애를 통하여 건축 교육을 받지 않았다. 인생 전반에 체험적인 학습과 실무를 축적하고 사상의 형성을 밟아 건축가로 대성한 것이다.

부친이 장식용 선반과 묘석을 주로 취급하는 돌 세공업자였기 때문에 미스는 여러가지 석재에 둘러싸여 자랐다. 피부로 느낀 이 소재가 나중에 ‘바르셀로나 파빌리온(1929)’으로 대표되는 돌로 둘러싸인 공간에, 또한 소년기에 경험한 건설 현장의 벽돌 쌓기에의 경험이 ‘벽돌조 컨트리 하우스 안(1923)’등에서 살아난다.

실업학교에서 몸에 익힌 제도술이 그를 건축으로 이끄는데, 무장식의 작품으로 유명한 그의 생애에 걸친 신념은 이 때에 배운 이오니아식 주두의 장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고향인 아헨의 설계 사무소에 기능인으로 고용된 일이 실무 경험의 첫걸음이 된다. 베를린에 나가기를 권장받은 미스는 예전 신건축의 기수 부르노 파울에게 사사받고 시공주 제 1호 철학자 아로이스 릴과 만난다. 릴과 맺은 인연으로 1920년대까지 차차 주문을 늘려가면서 철학을 배우고 결혼도 한다. 또한 피터 베렌스의 문하에 들어간 일은 평생 경쟁관계이던 월터 그로피우스와 르 꼬르뷔제뿐 아니라,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알고 모더니즘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싱켈과 같은 고전주의 건축가를 재평가하는 기회도 가졌다. 무엇보다도 제 1차 세계대전 후의 다다이스트인 한스 리히터와 맺은 교우관계야말로 아방가르드의 안내가 되었던 것이다.

전위집단 ‘11월 그룹’에 참가한 그는 건축부분의 책임자가 되어 이윽고 독일공작연맹 부회장에 취임하고 ‘바이센호프 지드룽’을 지휘한다. 1930년에는 ‘투겐트하트 저택’을 짓고 바우하우스의 제 3대 교장으로 부임한다. 1920년대 아방가르드와 나눈 교재는 ‘프리드리히가의 오피스 빌딩’등의 작품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미스에게 시대와 건축예술에 대하여 생각하도록 촉구하였다. 제 1차 세계대전후의 새로운 사조가 활발하게 논의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그의 이념적 방황은 슈펭글러로부터 시작되고 작품경향은 유동공간으로 옮겨진다.

사회가 대공황으로부터 전체주의로 바뀌면서 그의 작품은 껍질과 같은 외벽으로 네 기둥을 둘러싼 공간추구형의 코트 하우스로 이행한다. 사상도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머스 아퀴나스에 접근하고 50세 때는 시대와 자기 작품을 결부하는 사상, 즉 아우구스티누스의 ‘미는 진리의 빛이다’와 토머스의 ‘진리는 사물과 지성의 일치이다’에 이른다.

그에게 사물은 건축이고 지성은 동시대성, 즉 ‘시대의 의지’를 의미하였다. 그 시대와 일치된 건축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유동 공간에서 파시즘 하의 껍질로 막힌 코트 하우스로 변화한다. 그리고 나치스의 압력에 따라 바우하우스를 폐교하고 미국으로 이민한 뒤에 유리상자등 방해가 없는 세계적인 공간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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