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네로는 왜 폭군이 되었는가?

등록일 2003.09.16 한글 (hwp) | 3페이지 | 가격 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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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로(서기54-68년)의 초기 치세(治世) 5년은 선정을 베푼 시기로 불린다. 실제로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세운 유연한 행정체계를 발판 삼아, 네로의 정부는 제국의 평화를 지속시키고, 국경선을 지키고, 해적들을 토벌하고, 속주에서 관직을 남용한 재산의 부당취득 죄를 원로원에서 엄격히 재판하게 함으로써 세금 징수원들과 속주 총독들의 횡포를 규제했다. 또 황제 앞에서 열리는 재판이라든가 부패한 해방노예의 지배 등 클라우디우스 말년에 있었던 나쁜 관례들을 없애고 원로원에 더 많은 독립권을 허용했다. 그가 원로원 회의장에서 낭독한 새 황제의 ‘시정연설’을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정연설 중, 그는 원로원의 권리를 존중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입법부의 지위를 원로원에 돌려줌으로서 원로원의 독립권을 허용해준 한 가지 예이다.
네로의 측근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많았다. 이들 중의 한명인 세네카는 『관용에 대하여』(de Clementia)라는 책을 출판해 네로에게 관용을 가르치는 스승이었다. 그는 네로가 어릴 때에 네로를 대신해 부루스 Sextus Afranius Burrus (? -AD62) : 세네카와 함께 네로의 주요 고문관이었다. 갈리아 출신으로 로마군 장교로 임관되었으며 51년 아그리피나의 도움으로 근위대장으로 승진했다. 62년 죽을때까지 제국의 정책과 행정을 맡았으며 네로에게 독살당했다고 하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와 함께 직접 제국을 다스리기도 했다. 그리고 네로가 성장해 정치를 할 때에도 보좌관으로써 대신 정치를 할 때도 많았다. 예컨대 네로가 정치나 군사보다 음악이나 시를 더 좋아한 관계로 많은 분야를 남에게 맡겨버렸는데 세네카가 그 일을 대행해 온 것이다. 또한 그는 티베리우스만큼 과감하지는 않았지만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에 대한 대처는 티베리우스 못지않게 신속했다.
세네카와 더불어 코르불로 또한 유능한 인재 중의 한명이었다. 그는 강국이자 적국인 파르티아와 평화조약을 맺음으로서 그동안 안보문제였던 아르메니아―파르티아의 문제를 해결했다. 오랜 숙적이었던 파르티아 왕가가 일부러 로마까지 와서 황제에게 아르메니아 왕관을 받게 함으로써 로마가 파르티아보다 우위에 있다는 증거를 보였다. 그는 또한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부하 병사들만이 아니라 적들에게도 인망이 높았다. 코르불로가 온후한 성격이라서 누구나 따뜻하게 대해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코르불로는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것이 아군만 아니라 적에게도 인망이 높았던 이유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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