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중세사] 봉건제
- 최초 등록일
- 2003.08.19
- 최종 저작일
- 20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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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결론
본문내용
◈ 봉건제 : 의미와 연구 방법론 - D. 헐리
의미
"봉건적"이란 단어는 수세기에 걸쳐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사용되어 온 말이다. 그 말, 또는 그 말의 직접적인 원형은 881년 경 "feos" 또는 "feuf"란 형태로 부르군드사회의 문서들 속에 처음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서 그것은 지불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일종의 동산(動産), 아마도 가축이란 뜻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유물 또는 재산을 의미하는 한 프랑크 말(fehu)이 그것의 어원이라는 것이 유력한 견해로 되어 있다. 또한 그 말은 현대 독일어의 "Vieh", 즉 가축이란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유력한 견해이다. 그 말이 처음 나타난 시기와 나아가 뒤이은 다음의 시대는 대부분의 서유럽 지역들에서 심각한 혼란의 시대였다. 외부로부터는 노르만족, 사라센인, 바냐르족이 유럽을 공격하였고, 사회 외적으로는 크고 작은 세력가들이 끊임없이 서로 싸웠다. 또한 그 무렵은 문헌사료 속의 용어들과 이 용어들이 묘사하는 제도들과 생활이 끊임없이 변화를 겪게 되는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11세기부터 유럽은 10세기의 혼란상태로부터 회복되기 시작했고, 점차 그 나름의 제도들 속에서 새로운 안정을 이룩하게 되었다. 봉건제에 관한 발달된 용어들은 주로 11세기와 12세기의 산물이라고 말함이 여전히 옳을 것이다. "feodum" 곧 봉토 fief란 말은 비로소 하나의 구체적인 대상, 즉 우리가 그것의 특성을 뒤에서 고찰하게 될 것이지만, 무조건적으로 양도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달린 하나의 토지를 뜻하는 생동감을 가진 단어가 되게 되었다. 나아가 11세기 후엽부터 서유럽은 하나의 참다운 문화적. 지적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질서를 존중하는 정신으로 충만해 있었던 것 같은데, 중세의 사람들은 그런 정신을 그들의 종교적 신념과 철학적 사고 속에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생활화하고 있는 법률과 관습 속에서도 추구하고자 했다.
새로운 법률학은 또한 봉건적 관습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재판상에서 일어나는 실제적 문제들을 통해 고대의 성문법들이나 군주의 칙령들이 사회의 모든 기본적 제도들과 관행들을 포괄하고 있지 못함이 여러 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성문법 외에 많은 관습들이 존재하였고, 이 관습들 중 중요한 부분은 인적 관계나 토지보유, 봉신제, 그리고 봉토에 관한 것이었다.
중세 후기 알바로또와 다른 법학자들은 따라서 봉토에 관한 관습들의 종합은 지역적 특이성들의 무체계적인 집합 이상의 것이며, 오히려 공통된 일반원리들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참다운 법체계를 성립시킨다고 가정하였다. 그러나 이들 법학자들은 이들 관습들이 단지 사회를 지배하는 법 전체의 일부를 구성할 뿐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의 진정한 의미의 "봉건적 통치조직"이나 "봉건사회"가 현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하지 못했으며, 더욱이 그런 것들이 <font color=aaaaff>..</font>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