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조사

등록일 2003.07.22 한글 (hwp) | 8페이지 | 가격 1,000원

목차

*비석의 상태

*비문의 내용

*신묘년 기사

*일제학자의 주장

*정인보의 주장

*1972년 재일 사학자 이진희

*이형구

*비문의 변조

*비문의 재발견와 신묘년 기사

*비문변조설의 진위

*신묘년조의 해석

*중국학자 왕건군의 주장

본문내용

신묘년조의 수수께끼는 비를 세운 고구려인의 천하관을 통하여 풀 수 있다. 비문에서 왜는 광개토왕의 거사를 방해하는 '악의 무리'로 나타난다. 399년에 백제와 왜가 화통하자 왕이 몸소 평양까지 순행하였고, 400년에는 신라왕의 요청으로 신라를 침입한 왜를 응징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대방고지에 침범한 왜를 왕이 몸소 토벌하였다.
이러한 '왜'가 처음 나타난 곳이 바로 신묘년조이다. 여기에는 396년에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벌한 이유가 담겨져 있다. 광개토왕은 고국원왕의 전사를 설욕하고, 유일한 적수를 굴복시키기 위해 백제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그 이유를 왜라는 '악의 무리'에서 찾은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인의 관념속에서 백제는 이미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질서 속에 편입된 속국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가 한반도 남부에 침입하여 그 질서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를 응징 하려고 백제를 정복하였다고 비약시켜 말했던 것이다. 신묘년조는 액면 그대로의 사실은 아니며, 단순한 허구도 아니다. 당시 왜라는 존재가 있었고, 이들이 때때로 한반도 남부에 출몰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의 왜는 백제나 신라를 정복할 만한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비를 세운 고구려인들은, 광개토왕이 백제를 정복하고 신라, 가야지역 에 군대를 보낸 조치를 정당화하려고 왜의 존재를 과장함으로써 마치 이들이 백제나 신라를 '정복'한 것처럼 비문에 새겨놓았던 것이다.
어쩌면 왜를 고구려가 중심이 된 질서밖에 있는 존재로 간주하여 신속시켜야 할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표현인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능비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손 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이, 글자 몇 자가 바뀌었다고 비문이 전하는 역사상 전체가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자들의 음모가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진실은 결코 묻혀질 수 없 다. 광개토왕릉비에는 아직도 많은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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