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을미사변
- 최초 등록일
- 2003.07.20
- 최종 저작일
- 20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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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종의 즉위와 함께 그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이 국정 어느 부분보다도 신중을 기하며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왕후 간택문제였다. 왕후 그자신의 인물도 문제였지만,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해를 몸소 겪으며 살아왔던 그로써 어떤 가문의 딸을 맞아들이느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16세였던 민씨는 두 번에 걸쳐 왕후를 배출한 뼈대 있는 명문가이면서 주위 친척 가운데 권력자가 거의 없는 그야말로 ‘만만한’ 상대였으며 매력적인 왕후감 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궁핍한 가정환경에도 어려서부터 경서를 즐겨 읽어서 기본적으로 사려 깊은 성격을 가졌고, 풍부한 교양을 가졌으며, 왕비가 되고나서도 ‘주역’, ‘자치통감 강목’, ‘춘추좌씨전’ 등을 즐겨 읽어서 탁월한 정치 감각을 겸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총명함’ 때문에 처음 대원군이 의도한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왕비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본문 중-
목차
1. 서론
2.명성황후의 등장과 대원군과의 갈등
3.민씨 즉위 후의 세계정세
4.을미사변의 배경
5.을미사변의 결정적 원인 `인아거일`
6.을미사변의 준비과정
7.일본의 명성황후의 시해준비의 치밀성
8.을미사변의 진행 과정
9.대원군 행차에서의 의문점
10.명성황후 시해 당시 상황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
11.을미사변 이후 나타난 변화
12.결론
본문내용
고종의 즉위와 함께 그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대원군이 국정 어느 부분보다도 신중을 기하며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왕후 간택문제였다. 왕후 그자신의 인물도 문제였지만, 외척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해를 몸소 겪으며 살아왔던 그로써 어떤 가문의 딸을 맞아들이느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16세였던 민씨는 두 번에 걸쳐 왕후를 배출한 뼈대 있는 명문가이면서 주위 친척 가운데 권력자가 거의 없는 그야말로 ‘만만한’ 상대였으며 매력적인 왕후감 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궁핍한 가정환경에도 어려서부터 경서를 즐겨 읽어서 기본적으로 사려 깊은 성격을 가졌고, 풍부한 교양을 가졌으며, 왕비가 되고나서도 ‘주역’, ‘자치통감 강목’, ‘춘추좌씨전’ 등을 즐겨 읽어서 탁월한 정치 감각을 겸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총명함’ 때문에 처음 대원군이 의도한 ‘말 잘 듣고 고분고분한’ 왕비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참고 자료
명성황후-최후의 새벽 쓰노다 후사코 저 김은숙 편 1999 조선일보사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선전포고 없는 일본의 대러 개전 최문형 저 2001 지식산업사
명성황후와 대한제국 한영우 저 2001 효형출판
조선은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덕주 저 2001 에디터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기의 국제관계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1998 동림사
새롭게 읽는 명성황후 이야기 유홍종 1999 현대문학
명성황후 시해사건 웨베르 보고서 이영숙 2001 한국전통문화복원사업회명성황후추모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