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의 사상, 정책, 생애, 기묘사화
- 최초 등록일
- 2016.09.24
- 최종 저작일
- 20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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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애 및 평가
2. 사림의 등장
3. 조광조의 정치사상
4.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 (1519)
본문내용
평가
인종 원년(1545) : 관작의 복원이 이루어짐
선조 원년(1568) :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선조 3년, 6년 : 각각 죽수서원, 도봉서원이 건립
선조 9년 : 스승 한훤당과 함께 그를 기리는 양현사(兩賢祠)가 세워짐
선조 38년 : 심곡서원이 세워짐
광해군 2년(1610) : 조정에서 예관을 보내어 가묘에 제사를 지냄
1667년: 조광조가 사사의 명을 받고 죽은 유배 터에 송시열의 글을 새긴 “정암조광조선생 적려유허비”가 세워짐
1892년 고종 29년, 현재 세상에 전하는 ‘정암집’이 만들어짐
현재의 논쟁적 평가 : 유교적 이상정치를 꿈꾼 개혁의 순교자 or 시대에 맞지 않는 성급한 개혁정치로 인해 부작용을 낳은 정치가
2. 사림의 등장
역사적 배경
-조선 초기의 역사를 정치사회사의 측면에서 고려해볼 때, 그것은 일단 사림파와 훈구파간의 갈등의 지속과정이며, 동시에 사림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훈구파의 대체세력으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조선왕조는 여말부터 성장한 신흥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삼아 세운 국가로 이들은 개국과정에서부터 두 계열로 갈라져 있었다.
1) 이성계를 도와 개국에 참여한 개국공신들로 집권세력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세력
2) 정몽주와 같이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하되 불사이군의 생각을 바탕으로 역성혁명을 반대한 세력
1)은 중앙의 관직을 독점하면서 권력을 집중시켜 나아갔다. 이들은 성종이 즉위한 때부터 훈구파라는 정치세력으로 기틀을 다지게 된다. 이들 소수 공신가문이 주요 관직은 물론 각 지역에 토지를 확대해 가면서 대토지를 소유하여 폐단이 드러났다.
사림파의 형성
-국초부터 비조직체로서의 ‘사림’이 존재한 것은 보편적인 현상. 그중 영남과 기호 두 지방의 사림이 가장 대표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각기 다른 처지에서 중앙에 진출, 가끔 정치적 활동을 펴기도 했으나, 하나의 조직으로 성립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