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제주반란(4.3사건)의 진정한 의미

등록일 2003.07.05 한글 (hwp) | 12페이지 | 가격 1,500원

목차

1.문제제기
2.4.3사건전후 제주도민의 생활상 어려움
(1)일반적으로 밝혀진 인명및 재산피해
(2)제주도에 드리운 고통의 그림자
-4.3발발이전
(3)본격적인 고통의 시작
-4.3발발이후

본문내용

진압군이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기 이전인 1948년 9월 말까지 6개월 동안 4·3 발발로 빚어진 인명피해는 1,000명 미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10월 이후 진압군에 의해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면서 제주섬은 그야말로 ‘피로 물든 섬’이 되고 말았다. 인명피해를 다소 축소한 인상을 주고 있는 미군 정보보고서(1949년 4월 1일자)에도 “1949년 3월 현재 사망자 숫자가 15,000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1948년 10월 이후 인명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됐음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이 미군 기밀문서에는 “사망자들은 적어도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고 기록, 군경토벌대에 의한 인명 희생이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4·3은 이런 인명피해 뿐만 아니라 엄청난 재산상의 손실도 가져왔다. 160개 부락이 참화를 입었으며, 불타거나 파괴된 피해가옥이 15,200여 세대, 35,900여 동에 이르고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재민 수는 당시 전체인구의 35%가량인 91,000여 명에 달했다. 소, 말, 돼지 등의 가축과 산림피해도 엄청났다.
4·3의 비극은 과거지사가 아니다. 수많은 제주도민의 죽음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희생자의 유족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혹은 형이, 혹은 삼촌이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토벌대의 총에 사살되었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에 ‘붉은 것’으로 낙인찍혀 연좌제의 사슬에 매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제주의 인물난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4·3은 또한 제주도 전통적인 공동체 의식을 파괴하는 등 막대한 정신적 피해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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