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남은 임진왜란
- 최초 등록일
- 2016.05.26
- 최종 저작일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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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592년 4월 13일 어선들이 조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평화롭던 오후 5시경 의문의 함선들이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다. 수평선 너머로 한두 대 모습을 드러내던 함선들은 끝을 보이지 않더니, 모두 700여척에 달했다. 함선의 돛에는 도요토미 가문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는 다급히 봉화를 올렸고, 부산 첨사 정발은 전함 3척을 거느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어서 대적할 길이 없자 성안으로 들어와 주민들을 안심시키고 군사와 백성을 모아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밀려든 왜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발을 비롯한 무수한 백성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200년간의 평화 속에서 살았던 조선에게 17만이라는 병력은 너무나 버거웠고, 동래를 시작으로, 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 제2군 좌로(左路)는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 제3군 우로(右路)는 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한성(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불과 20일 만에 한성은 함락당하고, 선조는 평양으로 피난하게 된다. 단숨에 끝날 것만 같던 전쟁은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7년이라는 시간동안 지속되고, 명과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끝이 나게 된다. 조선은 임진왜란 전에는 농지 면적이 170만 결에 달했으나 전란이 끝나고 광해군 시대에는 54만결로 줄어, 그만큼 농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국가의 조세 수입도 감소하였다. 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내어 인구가 줄고 가옥과 재산의 손실도 막대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인심이 흉흉하여 이몽학의 난과 같은 반란도 일어났다. 그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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