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지 서탑 명문 해독
- 최초 등록일
- 2016.04.25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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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미륵사와 미륵사지 탑
3.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
4. <금제사리봉안기>의 판독과 해석
5. <금제사리봉안기>의 성격
6. <금제사리봉안기>의 쟁점
7.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동양 최대의 가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익산 彌勒寺의 창건 주체는 이견 없이 『삼국유사』에 적혀 있는 대로 善花公主로 수용해 왔다.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백제 무왕(武王)의 왕비가 되었다는 내용은 향가 ‘서동요’를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무왕의 왕후이자 미륵사의 창건 주체라 할 수 있는 선화공주는 2009년 미륵사 서탑 해체 과정에서 <금제사리봉안기>가 출토되면서 ‘서동요’와 ‘미륵사 창건’의 사실 여부와 관련하여 진실 공방이 벌어지게 된다. 이에 대해 <금제사리봉안기>를 해석하면서 몇몇 쟁점들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2. 미륵사와 미륵사지 탑
‘미륵사(彌勒寺)’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한 절이다. 사자사(獅子寺)가 있는 용화산(龍華山) 남쪽 기슭에 좌청룡 우백호의 좌우능선을 두고 남향으로 거의 평지 상에 배치한 삼원(三院) 병렬식의 가람이다.
중원은 동원․서원보다 넓고 목탑이 조성되었던 곳이다. 그 중 미륵사 서원의 석탑(서탑 국보 11호)은 6층까지 반쪽 탑의 형태로만 남아 있는데, 한국 석탑의 원초적 양식으로서 목탑이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구조를 보여주는 중요한 탑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미륵사 석탑을 해체(2009년 1월 14일)하는 과정에서 사리장엄구가 출토되었고, 더불어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가 ‘善花公主’가 아니라 ‘百濟王后’로서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기록을 담은 <사리봉안기>가 함께 출토되었다.
<중 략>
6. <금제사리봉안기>의 쟁점
6.1 ‘미륵사(彌勒寺)’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에 대해
<사리봉안기>에는 ‘미륵사’의 명칭 유래나 ‘미륵’과 관련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이 기록물은 ‘미륵사’의 석탑 안에서 발굴된 ‘사리를 봉안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발원을 하는 글’이다. 만일 ‘미륵사’ 중원(中院)이나 중심이 되는 건물에서 기록이 발굴되었다면, ‘미륵사’와 관련이 있거나 그에 상응하는 내용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김상현(2009), 「백제 무왕의 왕후와 미륵사 창건」, 『한국사상사학회 학술발표회』, 한국사상사학회.
김주성(2009), 「미륵사지 서탑 사리봉안기 출토에 따른 제설의 검토」, 동국사학 제47집, 동국대학교사학회.
정진원(2012), 「익산 미륵사지 서탑 <금제사리봉안기> 해독과 쟁점들」, 한국어문학연구 제58집, 한국어문학연구학회.
조경철(2012), 「천년 만에 밝혀진 미륵사의 꿈과 사랑」, 국가기록연구 제18호, 국가기록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