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 라이벌 구도
- 최초 등록일
- 2016.01.10
- 최종 저작일
- 20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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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의 라이벌 구도에 대한 팀별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서론 : 라이벌 선정 이유
2. 본론
1) 흥선 대원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
2) 민비-시대 상황/ 정책 및 역사적 사실과 지향점
3) 평가
4) IF
3. 결론
본문내용
19세기 말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집권 당시 조선은 내부에서는 국력이 점점 쇠퇴해 지고 있었고, 외부로는 각종 외세의 유입으로 개항을 앞두고 혼란하던 시기였다. 다른 서구의 열강들이 점점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는 와중에 일본은 개항에 성공하여 조선보다 앞서서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안, 밖으로 혼란스러운 시점에서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는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각각 다른 방향의 정책적 가치관을 가지고 정책을 펼치며 대립 구도를 이어 나갔다.
흥선대원군은 왕실 중심의 정치, 즉, 조선 왕실 내부의 힘을 강화하여 자주적으로 국력을 키우려고 했었던 반면, 명성황후는 외부세력을 이용하여 무너져가는 국력을 키우려고 했다는 점에서 외교정책에 있어서 서로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이러한 정책의 방향은 당시 개항과 연관이 있고, 또 더 나아가서 일본의 식민 지배와도 관련이 깊다. 이는 오늘날에도 미치는 영향이 크며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다. 따라서 당시의 혼란한 국제 정세 속에서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서로 다른 길, 즉 쇄국과 개방이라는 선택한 흥선 대원군과 명성황후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둘을 라이벌로 선정하였다.
<중 략>
명성황후는 여흥 민 씨로 인현왕후의 가문의 사람으로서 양반가에 속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왕비 가택 전까지 양반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았다. 당시 외척세력의 존재를 견제하던 흥성대원군은 외척세력이 없는 명성황후를 황후에 간택하게 되고, 그 후 고종이 나이가 들면서 흥선대원군의 수렴청정의 기간이 지나면서 정권을 잡게 된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는 반대로 쇄국보단 개항이라는 정치적 지향점을 가지고 대외적으로는 국제 긴장의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하여 외교정책을 추진하는데, 명성황후가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19세기 후반 조선의 시대적 상황이 내적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인한 국가의 혼란이 계속되어지고 있었으며, 쇄국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발전이 뒤처지고 있었다. 또한 국외적으로는 서양의 통상요구로 인한 국가의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성황후는 개화를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참고 자료
[학위논문(박사)]흥선대원군의 행정사상 연구 2000년 김윤곤 단국대학교
근대 한국의 실패와 정치적 리얼리즘(Ⅰ) : 조선 말기 興宣大院君의 정치와 정치리더십을 중심으로 2003년 김영수
개화기 명성황후 민비의 정치적 역할 (開化期 明成皇后 閔妃의 政治的 役割)
1995년 이배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