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품제도의 형성과 변화 -골품제도의 형성과 그 변화 양상을 중점으로-
- 최초 등록일
- 2015.11.24
- 최종 저작일
-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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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 자료는 한국고대사 수업의 중간과제였으며, 이 수업에서 저는 A+로 수료하였습니다.
목차
1. 골품제의 형성과 특징
1) 골품제의 형성 시기
2) 두품제와 골제
3) 성골과 진골의 관계
2. 골품제의 변화
1) 통일신라기 진골의 분화와 특권의 약화
2) 두품층의 특권 소멸과 자각
3) 양인의 등장
3. 결론
본문내용
1. 골품제의 형성 시기
골품제가 제도로서 성립된 시기는 구체적으로 입증은 되지 않은 채 흔히 법흥왕 7년(520) 율령 반포 시로 보고 있다. 그런데 6세기의 금석문 자료 등은 율령 반포 이후에도 관등제의 체계화 등과 관련하여 골품제가 형성되어 간 듯 한 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성골과 진골이 불교적 이데올로기를 분식하고 있다고 보이는 바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 보다 이전에 성골, 진골의 명칭이 있었던 것처럼 되어 다소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성숙과정을 거쳐 당나라 제도의 영향 등에 의하여 진덕여왕 단계에서 관등규정 등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7세기 말 신문왕대에 골품제는 체계적으로 확립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2. 두품제와 골제
골품제의 ‘두품’은 ‘우두머리(두)의 등급(품)’ 이라는 뜻을 가졌으니, 읍락 사회의 지배자(두)들에 대한 신분 편제로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지』동이전을 보면 3세기 무렵의 삼한 사회에서는 각 읍락이 성장하고 있는 가운데, 읍락을 지배하는 지배자들은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명칭이 분화되어 있었다. 마한의 경우 신지와 읍차로 구분되었다고 하는데 이것 이외의 명칭도 있었다고 여겨지나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지배자들의 격의 구별은 수백 년 간 형성되어온 결과이며 세습적인 것이었을 것이므로 지배자들의 현실적 신분 등급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4세기 후반 첫 마립간인 내물마립간(365~402년)이 등장한 시기 즈음에 자연스럽게 지배자들의 등급은 6등급임이 인정되는 조치가 있었을 듯하다.
참고 자료
문정철, “신라 하대 골품제 변화와 지방세력의 대두”, 동국대학교 석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