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과 예송논쟁
- 최초 등록일
- 2015.11.24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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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저희 학과 발표문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발표 결과 A+를 받았습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본문
1. 시대적 배경
2. 1차 예송
3. 2차 예송
4. 예송 논쟁의 결과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예송논쟁이란 조선 현종 당시 궁중 의례 적용 문제 중 복상 기간을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 사이에 큰 논쟁이 있었던 사건을 말한다. 총 두 차례의 예송논쟁이 있었으며 붕당 간의 학파 내지 정파 사이에 있던 예학적 기반의 차이가 가장 큰 이유로 작용 하였다고 한다. 예송논쟁은 그 결과에 따라 이후 정국의 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 사건이었고 이와 동시에 조선의 정치가 어떠한 성향으로 기울었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우리 조선사에서의 붕당 정치에 큰 영향을 줬던 두 차례의 예송논쟁과 그 결과를 알아보자.
Ⅱ. 본 문
1. 시대적 배경
16세기의 조선은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며 정착된 시대였고 새로운 학문 분야인 예학이 이 시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학의 연구는 이 시기부터 전성시대를 이루에 되었고 예송논쟁의 시작은 광해군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 광해군이 폐륜의 죄목으로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함으로써 서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광해군과 북인들이 정권에서 물러나고 서인들이 약간의 기복은 있었지만 오랫동안 권력을 잡게 되었다. 특히 효종 대에 와서는 송시열이 등용되면서 서인의 권세는 더욱 확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다른 붕당 세력인 남인 세력이 소수이지만 남아있었고 때때로 남인에 의한 도전을 받았다. 또한 서인 내에서도 노론과 소론의 분립이 있었고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며 스스로 분립으로 세력이 약화되기도 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의제에 관한 문신들과 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일어났다. 이러한 논쟁을 속에서 당시 집권 하던 서인 세력과 남인 세력은 그들이 연구한 예학을 기반으로 논쟁을 이끌어 나가는데 이 논쟁이 정치 문제로 확대된다. 서인의 분립과 계속된 논쟁 속에서 계속적으로 남인은 서인에게 예학적으로 도전을 계속 했는데 이것이 처음 예송논쟁의 시작이었다.
예송논쟁이 일어난 원인을 알아보면 남인과 서인 사이의 예학적 기반의 차이를 근거로 들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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