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고구려 고분벽화
Ⅲ. 고구려의 종교와 신화
Ⅳ.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찾아보는 종교와 신화
Ⅴ. 맺음말
Ⅵ. 국문초록
Ⅶ. 참고문헌
본문내용
고구려 고분벽화는 1908년 샤반느(E. Shavannes)가 해전 집안에서 발견한 벽화를 학계에 보고함으로써 활발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발견된 90여기의 고분벽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여러 학문분야에서 시도되어왔으며, 그 결과 어느 정도 성과가 축적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연구는 크게 고고학, 미술사학, 역사학의 분야로 나누어 이루어져 왔는데, 미처 발굴되지 못한 벽화의 존재를 고려하면 아직 연구가 미흡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맞물려 한국, 중국, 북한, 일본의 고분벽화 관련 자료 공개와 공유가 이뤄지지 못하여 단편적인 연구에 그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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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불교가 시작된 것은 4세기 전반 동진의 고승지둔이 고구려 도인에게 편지를 보낸 기록과 357년경 안악3호분 벽화에 불교 관련 연꽃무늬를 보면 알 수 있다. 정식 공인은 372년(소수림왕 2년)으로, 당시 북중국을 지배하던 전진왕 부견이 불상과 불경을 승려 순도와 함께 고구려에 보낸 기록이 있다. 고구려가 불교를 공인한 것은 사회 체제를 재정비 하려는 목적이 가장 컸는데, 불교를 백성들의 정신적 통합을 위한 구심점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을 이어 고국양왕도 ‘불교를 믿어 복을 받으라’는 교시를 내리고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의 사원을 창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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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천 1호분은 중국 길림성 집안현 장천 분지 낮은 구릉위에 자리 잡고 있다. 벽화주제는 생활풍속과 장식무늬이며 널방 천장에 북두칠청이라는 명문이 있다. 1970년에 발굴되었는데 벽화의 내용과 구성이 불교사원을 연상시켜 주목을 받았다. 무덤의 앞방 고임 안쪽 한가운데에 여래 좌상이 묘사되어있고 그 좌우로는 부부로 보이는 남녀 공양자가 여래 앞으로 나와 공양하는 장면이 있으며, 여래와 공양자의 북쪽에는 비천이, 아래에는 보주와 주작 등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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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료 : 한국학중앙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