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세력의 성장 기반
- 최초 등록일
- 2015.06.22
- 최종 저작일
- 20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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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사림의 경제적 기반
2. 사림의 사회적 기반
3. 사림의 교육과 학통
본문내용
도입
사림은 사류와 같은 의미로 통시적으로 사용되었다. 사족·사류·사대부는 이와 비슷한 의미로 고려 후기 문벌귀족의 몰락 이후 지방의 향리자제가 과거를 통해 대거 등장하면서 능리능문의 학자적 관료로 대두되면서 하나의 신분으로 자리잡아갔다. 고려시대의 사족·사류는 향리·서리의 이족과 대칭되는 의미로서 관리가 될 수 있는 신분, 仕宦을 할 수 있는 가문을 의미하였다. 또한 사대부는 문신·무신과 유형을 달리하는 학자적 관료로서 현직관료와 관료후보자까지 포함한 지배계급이란 뜻으로 쓰였다.
사림이라는 용어가 집중적으로 사용된 시기는 기묘사화를 전후한 중종대로 4대 사화 때 피화된 신진사류를 지칭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훈구파에 비해 군현이족에서 사족화 하는 시기가 늦었다. 사대부가 고려 후기에 대두했다면 사림파의 가문은 여말선초에 성장하였다. 이들은 과거·첨설직·산관 등을 통해 사족화 하였다.
또한 그들은 중소지주로서 생활기반이 향촌 사회에 있었고 비록 상경종사 하더라도, 항상 처사적 취향을 가졌다. 따라서 농촌의 실정과 민중의 애환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관직보다는 학문을 중시하였고 그들의 환역도 대게 시종·문묘·교수지임과 양친을 위한 수령직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중앙정계에 투신하더라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여 권력구조에 깊이 참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림파에는 국혼을 하는 예가 거의 없었고 또 역대 공신 계열에 참여한 자도 별로 없었다.
1) 사림의 경제적 기반
여말 선초의 정치·사회·경제적 변동과 지방통치체제 개편에 따른 향·소·부곡의 소멸과 임내의 직촌화, 유불교체에 따른 재지세력의 불교시설·기반 인수, 기타 전란으로 인한 유이민의 대량발생, 성진농법의 수용을 통한 활발한 외곽지역 개발 등은 사림의 경제적 기반을 공고히 하는 요인이었다. 특히 고려 후기까지 토착향리·장리들의 장악 하에서 미개발된 상태의 임내지역은 기성사족의 낙향과 재지사족의 확산에 따라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인구의 증가와 이앙법의 보급은 각 주읍의 접경지대에 위치한 오지·벽지의 개발을 촉진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