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案’과 의화단 요약
- 최초 등록일
- 2015.03.24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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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기독교는 그 지파인 네스토리우스파가 당초에 경교란 이름으로 전파된 뒤 오랜 전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의 역사 전개에 큰 의미를 띄게 된 것은 제 1차 중영전쟁의 패배로 기독교의 선교가 근대적 형식의 국제조약에 의해 허여된 뒤였다. 그리하여 1844년 중미의 망하조약과 중불의 황포조약은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교회 건립과 청정부의 교회보호 의무가 규정되었다. 제 1차 중영전쟁의 처리과정에서 체결된 여러 조약에는 서양인의 내지 여행이 인정되지 않았고 여기에는 선교사도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주로 카톨릭 선교사의 ‘잠입선교’는 끊이지 않았으며 중국 측에는 이를 억제할 실제적 방법이 없었다. 선교사의 내지활동은 지방관을 비롯한 중국 관신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끝내 1856년 광서 서림에서 한 프랑스 선교사가 지방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제 2차 중영 전쟁에 참여하였으며 승전으로 체결된 1858년의 천진조약과 1860년의 북경조약에서 기독교 선교의 여러 특권을 얻어냈다. 내지 선교의 인정은 기독교 세력 확장의 외적 조건일 뿐 아니라 각지에서 선교사 및 중국인 신도와 비신도 사이에 갈등을 심화시켜 결국 중국 전역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된 반기독교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대체로 19세기 후반 신교가 광동, 복건, 절강 등 남동 해안을 선교의 근거지로 삼은 데 비해 카톨릭은 적극적으로 내지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카톨릭 교회는 재정의 대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경제 활동은 필연적으로 지방의 경제적 이해와 마찰 하였다. 더욱이 선교사들은 조약상의 영사 재판권을 확대 해석하여 중국인 신도도 치외법권의 대상에 포함시키려 하였기 때문에 지방당국과의 마찰은 피하기 어려웠다.
기독교가 해금된 뒤 교민의 수는 완만하나마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교민은 대부분 하층사회 출신이며 지배층에 속하는 관료나 신사는 기독교에 냉담하거나 반감을 품었다. 또한 교민은 교회 자산에 기대어 생존을 유지하거나 또는 지방관아나 토호의 억압을 피해 교회 세력의 비호를 얻으려 입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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