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의 분열과 수의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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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2.24
- 최종 저작일
- 20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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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기 초에 후한이 멸망하고 위, 촉, 오가 경쟁하는 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삼국은 사마염이 세운 진(晉)에 의해 통일되었으나, 황실의 내분에 따른 전란으로 혼란이 여전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북방의 다섯 민족(5호)이 화북에 침입하여 여러 나라를 세웠다(5호 16국 시대). 이에 진은 강남으로 이주하여 동진을 건국하였고, 흉노가 쇠퇴한 다음 선비족이 세운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여(439) 남북조 시대가 열렸다.
북위의 효문제는 뤄양으로 천도하고, 한족의 문물을 수용하는 한화 정책을 실시하여 선비족에게 한족 성씨를 쓰게 하고 한족과의 결혼을 장려하였다. 또한, 자영농을 육성하기 위해 균전제를 실시하였는데, 균전제는 수·당에도 계승되었다. 그러나 효문제의 개혁 조치는 귀족의 반발을 샀고, 효문제 사후 귀족들의 내분으로 북위는 분열되었다.
한편, 동진은 원주민과 이주민의 대립, 문벌 정치의 폐단으로 정치가 불안하여 오래가지 못하였고, 이후 송, 제, 양, 진으로 교체되었다. 강남에 이주한 한족은 창장 강 유역을 개발하고 벼농사를 보급하여 강남의 경제력을 향상시켰고, 이에 따라 강남의 인구도 늘어났다. 화북에서 이주한 지배층은 9품중정제를 통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문벌귀족으로 성장하였다. 문벌 귀족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수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는 6세기 말까지 분열이 지속되면서 남조와 북조는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문화는 전쟁과 혼란으로 민족 이동과 융합이 활발해지면서 수·당 시대의 문화적 번영을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유목민이 화북을 차지하면서 이들의 생활 문화가 중국 사회에 서서히 퍼져 나갔다.
유목민이 먹던 염소와 양의 젖이나, 소매가 좁고 몸에 붙어 활동하기 편한 그들의 옷이 한족 사이에 유행 하였다. 또한, 주거 생활에도 변화가 나타나 유목민이 사용하던 의자나 침대를 한족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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