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안의 파시즘
- 최초 등록일
- 2014.11.25
- 최종 저작일
- 20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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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일상생활, 규율 권력, 교실 이데아
2. 파시즘의 아비투스-가족, 시민 사회, 국가
3. 맺음말
본문내용
1942년 당시 10살의 소년이었던 움베르토 에코는 파시스트가 주관한 청소년 글짓기 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글짓기 주제는 ‘무솔리니의 영광과 이탈리아의 불멸적 운명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쳐야만 하는가?’였다. 에코 자신의 표현을 빌면, 그는 이 질문에 ‘거만한 수사’로 그렇다고 답해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에코처럼 거만한 수사는 못 되지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 우리의 정답 또한 어린 에코의 대답과 일치한다. 학교 규율을 동원하여 이 초라한 수사를 어린 학생들에게 외우도록 강제했던 인격화된 정치 권력은 가고 없지만, 그의 의도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중 략>
1997년 서울. 서울대학교가 타교생이나 졸업생들의 도서관 출입을 막기 위해 학생증 바코드를 만들었다는 1단 기사. 고시와 취업 때문에 느닷없이 대학가를 강타한 면학 열풍이 도서관을 늘 만원으로 만들었고, 자리가 부족한 도서관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누적되어 학생회와 협의 끝에 취한 조처라는 설명이다. 서울대학교만큼 언론의 조명은 못 받았지만, 다른 대학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다른 어느 대학의 학생회도 외부인의 도서관 이용 금지 조치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것의 사회적 의미를 물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정치적 지향이나 운동의 논리에서 볼 때, 1968년의 파리와 1997년 한국의 학생 운동 간에 이념적 차이는 찾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적어도 노동자-학생 연대라는 구호를 공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양자 사이의 메울 수 없는 문화적 거리를 직감한다. 각 행위 주체의 의식 심층에 깊게 뿌리박고 있는 이 문화적 차이는 정치적 구호를 공유한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는 궁극적으로 대학과 사회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의 차이로 드러난다. 1968년의 파리가 대학의 공공성을 쟁취했다면, 1997년 이후의 한국은 대학의 생산성 논리에 패배했다.
참고 자료
임지현 외, 우리 안의 파시즘 , 삼인,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