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의문사 사건
- 최초 등록일
- 2014.11.25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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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노동 운동가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1970년)
2. 학생 운동가 이세종 사망 사건(1980년)
3. 광주 시민 김경철 사망 사건(1980년)
4. 전남대 학생 5·18 학생 시위 사건(1980년)
5. 학생 운동가 박종철 치사 사건(1987년)
본문내용
광주 5·18사건은 명칭이 “광주민중항쟁”과 “광주민주화운동”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기존에 일반인들이 써오던 명칭이었고, 후자는 1988년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5·18을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으로 인정되었다. 1997년 대법원은 5·18, 12·12 관련자로 전두환, 정호용, 이희성, 황영시 등을 5·18 민주화 운동의 진압 책임자로 판시하면서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법률적으로 재평가 받게 되었다.
<중 략>
1980년 5월 전북대 학생회관에서는 대학생들이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지난 보름 이상 동안 전국 대학생 10여 만 명이 학생 시위에 참가했으며 김제 출신의 평범한 농학도였던 이세종 군도 학생회관의 농성에 참여하고 있었다. 1980년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고, 신군부 계엄 포고 제10호에서 대학교 휴교령이 선포되었다. 전국 각 대학에 계엄군이 주둔했고, 학생들이 철야 중이던 학생회와 학생회관 그리고 밤늦게까지 불이 켜진 도서관으로 계엄군이 들이닥쳤다.
<중 략>
광주 금남로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1980년 5월 17일 대학교 휴교령선포 후 5월 18일 계엄군이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학생들 50여 명의 등교를 저지했다. 학생들은 “계엄 해제”, “휴교령 철폐” 등을 외치며 계엄군을 상대로 시위를 벌이다가 공수부대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같은 날 학생들의 돌에 맞아 부상자가 발생한 계엄군은 곤봉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시작했고 , 그로 인해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때 계엄군과 시민들 가운데 첫 부상자가 발생했다. 일부 학생들이 교문에서 나와 광주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전남대생 3백여 명이 가톨릭회관에 모였고, 경찰이 최루탄으로 그들을 해산시켰다.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면서 공수 부대의 무차별적 구타가 일어났고, 이를 목격한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조했다. 5월 20일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시민 김만두, 김재화, 이북일, 김재수가 사망했고, 시민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