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성립과 박은식
- 최초 등록일
- 2014.11.14
- 최종 저작일
-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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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성립배경
1) 계몽사학의 한계와 사회진화론
2) 사회진화론의 극복과 민족정신
Ⅲ.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성립
1) 박은식의 영웅주의적 역사인식
2) 박은식의 국혼론적 역사인식
ⅴ.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한말 근대성을 띠어가던 계몽주의 역사학은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전에 식민주의 사학에 오염되어갔다. 계몽운동기의 사학은 식민주의와 근대성을 구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실학시대의 사학이 갖는 실증성과 계몽주의 역사학이 갖는 근대성을 내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키는 동시에 식민주의 사학에 대응하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간 역사학자들도 있었다. 朴殷植, 申采浩, 金敎獻, 李相龍, 黃義敦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을사조약 후 일제의 침탈이 더욱 노골화 되고 1910년 한일합방으로 국권이 피탈된 상황에서 계몽기의 자강책과 실력양성운동이 가지는 한계성을 반성하기 되었다. 당면한 현실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그들이 처한 시대와 상황을 객관적이고 명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국에 대한 긍지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확고한 ‘민족정신의 필요’라고 하겠다.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국사의 중요성과 교육이었다.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매장된 국사를 자주적으로 인식하고, 그 인식이 지식인 일부가 아니라 민중 모두에게 교육되어 국권회복과 자강의 정신적 동력을 마련하는 것이 목적이라 하겠다.
<중 략>
Ⅲ. 근대 민족주의사학의 성립
1) 박은식의 영웅주의적 역사인식
1910년대 일제의 무단통치기로 접어들면서 대부분의 민족 사학자들은 국외로 망명하게 된다. 박은식도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고구려의 옛 유적지를 답사하고 『泉蓋蘇文傳』, 『東明王實記』『明臨答夫傳』『安重根傳』『李儁傳』『夢拜金太祖』『渤海太祖建國誌』『大同古代史論』『韓國痛史』『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을 저술했다.
시기에 따라 이 저술들은 그의 변화하는 역사인식을 대변하는 변론자로서 역사에 남아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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