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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의 혼란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의 통일로 막을 내린다. 진시황은 전국을 36군과 72현으로 나누어 다스리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통치 이념인 법가사상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를 확립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진시황의 통일 정책은 영토나 정치권력에 머물지 않았다. 자, 저울, 되 같은 도량형제도와 화폐를 단일화함으로써 경제적 통일을 꾀하였고, 분서갱유를 통해 사상적 통일을 이루려 하였다. 특히 사상 통일을 위해서 제자백가의 책을 지닐 수 없도록 하는 협서율을 만들었으며, 의학, 약학, 점복, 농사 등 실생활에 필요한 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고전을 거두어 불태웠다. 그러나 법가에 치우친 진나라의 정치는 법에 익숙하지 않은 통일 이전의 사람들에게 폭압정치로 비쳤고, 오직 법가라는 단 한 가지 사상만을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진의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한나라 초기에는 진나라 시대의 사상적 통제는 사라지고, 제자백가를 비롯한 고서들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과 그의 공신들 대부분은 지식인이 아니었고, 건국 초기의 혼란으로 인해 학문과 사상의 부흥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도 없었다. 때문에 무제 이전 시대까지는 진나라 시대의 다양한 사상들이 혼재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즉, 한나라 초기에는 한 가지 특정한 학파만이 중시되지 않고, 다양한 사상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도가 계층의 황노사상이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유행했다. 엄격한 법과 제도에 입각하여 강압적인 통치를 시행한 진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유산을 없애버리고자 했던 한나라의 지배층으로서는 억지로 함이 없는 정치, 즉 무위의 정치를 시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도가는 유가가 자신들 사상의 근원으로 요순을 내세우는 것에 맞서 한족의 시조인 신화적 인물 황제를 빌려 왔기 때문에 황제와 노자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황노지학이라고 불렸다. 한 혜제 2년, 상국이었던 소하가 병으로 죽자 조참이 뒤를 이어 상국에 임용되었다. 조참은 당시 백성들이 극도로 피폐된 사실을 보고 무위의 황노사상을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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