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진사에 대한 조명
- 최초 등록일
- 2014.10.14
- 최종 저작일
- 20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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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도입과 정착기
2) 아마추어사진의 성장기
3) 프로사진의 정착기
4) 사진의 국제화 시기(1980년대 후반)
5) 오늘날의 사진
본문내용
한국의 사진사의 발전을 언급하기에 앞서 먼저 한국인 최초의 사진 접촉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사진이 발명된 뒤 24년이 지난 1863년 중국 청나라 수도 베이징에서 이뤄졌다. 당시 연행사 일행이었던 이항억, 박명홍, 오상준 등과 역관들은 1863년 3월 19일 베이징 아라사(러시아)관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진을 촬영했다. 다산 정약용은 작은 상자를 이용해 그림을 그렸다. 우리나라 최초 카메라 옵스큐라이다. 서양의 문화 속에서 등장하는 최초의 한국사진은 1871년 신미양요 당시에 촬영 한 강화도조약이다. 일본인에 의해서 조선인과 강화도 풍경이 촬영되었다. 실질적으로 한국에 사진이 처음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문헌상으로 밝혀진 것은 1884년 지운영이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 마동에 사진관을 차린 때부터이다. 그는 통리외무아문의 주사로서 일본을 드나들면서 남보다 먼저 새로운 문물에 접했던 것이다. 특히 한말의 서화가로서도 알려진 그가 사진에 관심이 끌리게 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뿐만 아니라 건장한 체구와 날렵한 기민성, 그리고 큰 담력의 소유자였으나, 수구파와 개화파의 싸움에 그만 잘못 말려들어 비운의 일생을 마침으로써 그의 사진의 맥은 중도에서 끊기고 말았다. 즉 지운영은 김옥균 암살 임무를 띠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결국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나고, 양국 간의 복잡한 외교문제로까지 번져 함경도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 후 불교에 귀의해서 세상을 등짐으로써 더 이상 그의 사진의 맥이 이어질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의 본격적인 도입과 기술적인 보급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에 들어와서부터이다. 이때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한국진출에 힘입어 일본인들의 사진관이 여러 곳에 생기고, 당시 고종의 시종이며 영친왕의 서예 스승이었던 서화가 김규진이 석정동에 본격적인 사진관을 차렸다. 그 당시 사회적인 위치나 서화가로서 예술계에서 차지했던 큰 비중으로 그가 차린 천연당 사진관은 사진도입기에 있어서의 요람이었다. 김규진은 일반사람들의 초상사진을 제작함으로서 조선 사람에게 사진을 인식시키는 큰 공헌을 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