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 매춘의 역사, 조선시대의 매춘 , 조선시대의 매춘부, 매춘의 금지와 형벌
- 최초 등록일
- 2014.10.13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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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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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시대의 매춘
1)조선시대 결혼제도와 매춘
2)제도권 내의 매춘
2. 조선시대의 매춘부
1) 기생
2) 유녀
3) 주모
4) 사당과 남사당
3. 매춘의 금지와 형벌
본문내용
1. 조선시대의 매춘
1) 조선시대 결혼제도와 매춘
조선시대의 결혼제도인 일부일처제는 사회 인습적이고 계약적인 면이 강하여 그만큼 부부간의 성적 책임과 순결을 강조하는 결혼제도였다. 하지만 부부간의 성적 균형이 깨지면 매춘을 발생시킬 요소도 많은 결혼제도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매춘이란 일부일처제의 아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필요악’인 셈이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결혼과 매춘의 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데 매춘이 성에 대한 음탕한 유희에서 비롯된 것 이라는 편견만 배제한다면, 매춘은 결혼제도의 발달과 함께 시작된 인류 성문화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2) 제도권 내의 매춘
조선시대는 유교를 숭배하는 사회였다. 때문에 매춘은 풍속을 문란하게 하는 음란한 행위이며, 유교적 명분에 어긋난다고 하여 표면상으로는 매춘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결혼제도의 한계와 여러 문제로 인하여 실제로는 매춘을 완전히 금지시키지는 못하였고, 매춘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공식적이고 제도화된 장치를 두었다. 이 제도중의 하나가 기녀(기생)나 첩과 같은 제도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양반 등의 상류계급에서 소실(小室) 등 본처를 두고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축첩제도가 공인되었기 때문에 상류사회의 매춘은 소실제도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관기(官妓)라고 하여 지방관아에 소속되어 지방사또의 수청을 드는 일종의 공인된 제도가 있었고, ‘춘향전’에서 알 수 있듯이 관기 출신의 여성들이 경영하는 술집에서 매춘이 행해지 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소춘풍전’에서 보이듯 평양 등지의 고급 술집에서 양반들이나 상인 들을 상대로 매음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중・하류 계급에서는 지방의 주막집 주모나 작부들이 나그네나 고을 사람들을 상대로 매춘을 하였고 남사당 등 지방을 순회하는 예능인들이 공연 이 끝난 뒤에 매춘을 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