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의 매춘 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0.08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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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 매춘의 시작
2. 일본 강점이 남긴 것
3. 미군정이 남긴 것
4. 60~70년대 기생관광
5. 80년대 티켓다방
6. 성 매매 금지법
본문내용
한국 매춘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로부터 가무를 하는 유녀 고려시대의 기녀, 조선시대의 기생 등 남성을 상대로 유흥 접대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있었고 사당패들도 매춘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매춘은 극히 소수의 특수 신분에 속했고 나름의 엄격한 법도를 갖고 있었다
일제 강점이 남긴 것
개항이후, 일본의 제국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공창제도는 우선 조선 내의 일본인 거류지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청일전쟁 이후 공창 거류지의 유곽은 더욱 성행하게 된다. 일본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 조선인 매음부에 대한 성병검사도 실시하였으며, 기생과 창기 단속령을 발포하여 공창화 정책을 지속해 나갔다. 합방 직전 이미 공창제도를 조선에 심는데 성공한 일본은 조선에 진주한 일본군대와 본국 거류인들의 성욕 배설 공간을 자기 입맛에 맞게 확보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후 작부와 창부의 숫자가 인구증가에 비해 급증하게 되기까지 하며 합방 전에 비해 합방 이후 평균 조선인과 일본인의 창기의 총수가 4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불경기로 인해 공창이 힘을 잃게 되었지만, 사창은 오히려 더욱 번창하게 된다. 여기서 창부가 급증하게 된 이유로는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과 토지겸병정책, 1차 세계대전후의 불경기 등으로 생활고가 극에 달하자 유랑, 걸식보다는 매춘을 택하는 여성이 늘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 또한 매춘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유교적인 가치관이 허물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남긴 것
미국은 해방 직후 일본식의 공창문화를 단절시킨 주체이자 동시에 새로운 매춘문화를 이식시킨 또 다른 장본인이었다. 당시 미 군정 당국과 한국의 과도입법 당국은 공창을 폐지한다는 조치 그 자체만으로 이 땅에서 창기와 그들의 매춘행위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하지만 한 번 길들여진 매춘문화의 홀씨는 끈질기게 살아남아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사창은 더욱 번창하여 한국 전쟁이 끝났을 때에 창녀의 숫자는 5만 명을 웃돌게 된다. 미군은 해방 이후의 군정과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고 새로운 기지촌 매춘문화를 정착시키는 주역이 됩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