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의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0.04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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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대적 배경
2. 남자 서민복
1) 직령
2) 철릭
3) 심의(深衣)
4) 답호
5) 장의(長衣)
6) 액주름포
7) 도포(道砲)
8) 중치막(中致莫)
9) 창의(瑒衣)
10) 학창의
11) 두루마기
12) 소창의
13) 현단
3. 여자 서민복
1) 개짐
2) 단삼(團衫)
3) 활옷
4) 원삼
5) 소의, 염의
6) 예복 치마
7) 저고리
8) 남치마, 옥색저고리, 천담복
9) 쓰개치마, 장옷, 천의
4. 아동복
1) 남아
2) 여아 돌옷
5. 장신구
1) 노리개
2) 반지
3) 주머니
4) 비녀
5) 귀걸이
본문내용
1. 시대적 배경
조선은 1392년 건국한 이래 유교를 사회적 윤리의 바탕으로 삼았고, 그를 기본으로 한 봉건적 성격이 짙은 중앙집권사회였다. 조선의 신분계층은 크게 귀족(왕족과 외척), 사대부(양반), 중인(기술직 실무자), 서민(양반과 천민)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조선초기에는 복식과 기타 분야의 위계질서가 매우 엄격했는데, 태종과 세종대왕시대를 거치면서 예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성종 5년에 와서 '국조오례의'가 완성되었다. 이것은 조선의 공직적인 예법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고, 이때부터 조선의 복식을 비롯한 모든 예법은 '국조오례의'의 기준을 따르게 되었다. 한편 고려 말엽의 원나라에서는 목면기술이 매우 발달했고, 고려 말기인 1354년에 문익점이 비밀리에 원나라에서 조선으로 목면 종자를 도입시켰다. 목면은 질기고 방한력이 우수하다는 장점을 가졌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마, 저, 견, 모 등을 주로 사용해 온 이전에 비해 목면이 의료로 추가되면서 조선의 의생활은 더욱 다양해졌고, 1401년대에는 전 국민이 목면을 입을 수 있을 만큼 목면기술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엄격하고 까다로왔던 조선 초기의 신분체계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차츰 변화를 맞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임란과 병란 두차례의 큰 난리였으며, 이를 겪으면서 국가제도는 문란해졌고, 난리 중 양반들의 약한 모습을 본 서민들의 자의식이 눈을 뜸으로서 신분제도도 해이해지기에 이르렀다. 복식의 신분 구별 기능도 약화되어 양반 전용이었던 도포류를 차츰 일반인이 착용하게 되었고, 혼란 중에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의 과시욕으로 인한 사치현상도 만연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기틀이었던 유교 윤리도 그 효용을 의심받으면서 약화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성적 본능의 표출과 함께 여인 복식의 에로틱한 노출로 이어졌다. 삼국시대부터 여자의 저고리 길이는 길이는 계속 짧아졌고 치마길이는 상대적으로 길고 풍성해지는 양상을 보여왔지만 조선시대 후기에 이런 변화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 당시의 짧은 저고리는 가슴을 가리지 못할 정도가 되고, 치마를 최대한 부풀려 둔부도 매우 풍성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참고 자료
우리옷 이천년 - 미술문화, 2001년
복식문화사 - 신광출판사, 저자:유효순,최해율, 2000년
선비와 피어싱 - 동아시아, 저자:조희진, 2003년
생활사 박물관 - 사계절출판사, 200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