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사]쌀의역사
- 최초 등록일
- 2014.10.04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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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벼의 기원
2. 새로운 발견
3. 우리나라의 벼농사와 역사
4. 농경 서적
5. 일제의 쌀 수탈 정책
6. 산미증식계획
7. 새마을운동
8. 우르과이라운드
본문내용
벼의 기원
▣ 재배벼
재배벼(O. sativa L.)의 기원에 관한 주장에는 인도기원설, 중국기원설, 동남아기원설 및 아삼(Assam, India)·운남설 등이 있다.
이중에서 인도의 아삼지방과 중국의 운남성 부근을 아시아 재배벼의 기원지로 보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특히, 인도, 미얀마, 태국, 베트남 및 중국에 걸쳐 브라마푸트라강(Brahmaputra), 갠지스강(Ganges), 이라와디강 (Irawaddy), 샐위인강(Salween), 메콩강(Mekong), 양자강 등의 큰 강들이 아삼과 운남성 부근 고원지대로부터 발원되어 인도, 인도지나 반도 및 중국의 저습지대로 내려가고 있는데 이 강들의 물줄기를 따라 각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 나라에 전파된 벼는 바로 이 기원지로부터 양자강 및 황하를 따라 전래된 것이라 한다.한국의 고고학자 안승모의 저서 "아시아 재배벼의 기원과 분화(학연문화사 1999)" 를 참고, 고고학적 증거를 종합하여 볼 때 중국의 양자강 중류에서 하류지역이 아시아 재배벼의 기원지로 추정되며 이곳에서 재배되던 벼가 양자강 상류 운남을 거쳐 태국 북부에 도입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었고 한편으로는 중국 동해안을 따라 동남북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 략>
▶ 조선시대의 벼농사
조선사회는 신분에 따라 사회적인 차별을 두는 신분제 사회였다. 지배층의 중심을 이루는 양반은 일하지 않고도 부유하게 살아가는 길이 열려 있었고, 농사를 지어 이들을 먹여 살리는 농민은 평생 동안 흙투성이로 고생하여야 했다. 말하자면 이 시기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인생 길이 대강 정해져 있었다.양반들의 경제적인 기반은 그들이 소유하는 토지와 노비에 있었다. 중앙의 관료들은 과전에 제약이 가해지자 지주로서의 기반을 더욱 확대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억지로 빼앗는 등 수단을 가리지 않고 토지 소유를 늘려갔다. 농민들의 처지는 매우 고달파서 밭갈이부터 추수할 때까지 흙과 땀에 절어 살아야 했지만, 이렇게 애써 농사를 지어도 손에 남는 것은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농민들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농업 기술을 발전시키고 수리 시설을 늘려갔으며, 한편으로 늘어난 수확을 제 몫으로 만들기 위한 싸움을 벌여갔다. 그러나 이렇게 신분에 의거한 지배 체제는 농업 생산력의 끊임없는 증가와 농민의 성장에 힘입어 차츰 붕괴되어 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