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의 후삼국통일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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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신라의 분열과 견훤과 궁예의 등장
Ⅱ. 왕건의 등극
Ⅲ. 후삼국통일의 업적과 과정
1) 신라와 후백제의 멸망
2) 왕건의 정책
Ⅳ. 후삼국통일의 의의와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일찍이 신라는 서기 676년 (문무왕16년)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완전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 당나라연합군을 격퇴시킴으로써 처음으로 삼한을 통일하는 대업을 달성하였다.
그러나 삼국통일을 시킨 신라는 말기로 접어들면서 진성여왕 때부터 국권과 통치가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그에 앞서 신하들이 왕을 죽이는가 하면 귀족들끼리 서로 권력을 이용하여 왕위를 쟁탈하려칼을 맞서기에 이르렀다.
이 와중에 귀족들은 불법으로 가난하고 힘이 없는 농민들의 토지 등을 쟁탈해 갔다.
정부에 반항하려는 세력이 생겨날 것이라는 최치원의 진심어린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에 대비는 커녕 술 마시고 노래하는 날로 허송세월을 보냈는데 이 틈을 틈타 지방의 호족들과 농민들이 반기를 들고 국가에 대항하는 무리들이 나타난다.
<중 략>
왕건은 송악(개성)에서 그 곳 태수인 왕륭의 아들로 도선대사의 예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아주 어려서 아버지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후고구려의 신하로 되었다.
처음부터 왕건의 활약은 눈이 부시는 성과를 거듭한다.
청주지방과 남양일대를 장악하며 후백제의 중요한 요충지였던 금성(나주)을 빼앗아 궁예의 땅으로 만드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그는 장군에 있은 직후 나라의 가장 큰 벼슬인 시중에 올라섰는데 마음이 한편으로는 무겁기만 하였다.
궁예가 갈수록 정신이 이상해져갔기 때문이다.
<중 략>
이제 삼한은 고려와 후백제 힘없는 신라가 통일의 숙원을 위해 힘을 겨루는 일만 남게 된 것이다.
신라는 이미 국정이 많이 쇠퇴하여 실질적으로는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의 왕건이 실질적으로 삼국을 움켜잡은 셈이다.
후백제와 고려는 초기 화친을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양쪽 모두 빈번한 피해가 오고 가며싸움은 계속 끝나지 않고 지속되었다.
왕건은 공산전투에서 신라를 도와주려다 목숨까지 잃을 뻔한 큰 위기가 있었지만 후백제역시 고창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자초하였다.
참고 자료
이환경 『태조왕건』이환경대하역사소설1-2권
김갑동 『태조왕건』김갑동교수의 태조왕건
박영규 『후삼국기』박영규저자 후삼국기1-5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