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 전제 왕권 몰락의 재이해
- 최초 등록일
- 2014.09.25
- 최종 저작일
- 20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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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나말여초 시대
Ⅲ. 궁예의 세력 형성과 그 배경과 그 과정
Ⅳ. 철원 천도 이후 궁예의 전제 왕권
Ⅴ. 궁예의 실각과 왕건 쿠데타의 배경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시작하며
궁예 정권 하에서 쿠데타에 의하여 성립된 고려는 지배세력이 궁예 세력에서 왕건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결정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나, 여러 면에서 종종 두 정권 사이의 연속성이 다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개혁 보다는 오히려 계승의 내용이 더 많다’ 라는 것이 두 정권의 연속성에 대하여 말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주장인데, 고구려 세계관의 계승, 일정기간 자주적 연호의 채택, 9관등제의 유지, 광평성 체제의 계승 등이 그 내용이다. 뿐만 아니라, 궁예 정권 말기에 전제왕권이 확립됨에 따라, 왕건 집권 후 궁예의 심복들이 제거됨으로써 왕건의 의지에 따라 국정이 운영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 의하여 탐구되어진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두 정권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은 몰락과 통일 왕조로써의 번영이다. 궁예와 그의 정권은 나라를 개국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도움을 받았던 송악 호족의 대표인 왕건의 쿠데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되었고, 반대로 왕건은 고려 왕조의 개창을 넘어서서 후삼국을 통일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두 정권의 흥망성쇠의 원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원인의 탐구에 앞서서 선행되어야 할 것은 당시 시대의 적절한 이해이다. 특히나 후삼국시대 즉, 나말여초의 시대는 한국사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격동의 시기였다. 혼란과 무질서가 난무하는 시기를 틈타 호족이라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성장하였고 그들의 힘은 중앙 정부보다도 강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궁예 정권의 몰락에 대하여 그 실체를 재조명 해보고자 한다.
Ⅱ. 나말여초 시대
나말여초라 불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시대는 혼란의 시기였다. 신라의 진성여왕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농민 반란은, 이미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신라의 상황을 반증해 주는 것이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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