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 최초 등록일
- 2014.08.29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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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신해혁명의 배경
3. 혁명파의 성립
1) 손문의 흥중회
2) 중국동맹회 성립
3) 삼민주의
4. 신해혁명의 전개
1)무창봉기 발발
2)중화민국의 성립
5. 원세개의 등장
6. 신해혁명의 좌절
7. 신해혁명의 결과와 의의
8.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민족 자산 계급이 주도한 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화국을 수립한 혁명으로 1911년 우창 봉기로 시작되어 남경 임시 정부가 건립되었다. 전기 쑨원이 임시 대총통으로 추대되었으나, 후기 북양군벌 위안스카이는 쑨원이 임시 대총통 지위를 양위하여 임시총통으로 되고 군벌독재체제를 세웠다.
1911년이 12간지로 신해년(辛亥年)이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비록 이 혁명으로 공화정이 세워지긴 했지만 곧 위안스카이의 반동정치가 시작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제 2혁명으로 부르고 위안스카이 사후 군벌들의 할거에 대한 대항을 제3혁명으로 부른다.
본문에는 신해혁명이 발발하게 된 배경과 전개 과정에 나타나는 손문의 행적과 신해혁명이 중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친 영향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중 략>
국회에서 정식 대총통으로 당선된 원세개는 국회를 해산시키고 ‘임시약법’을 총통제로 고쳤다. 그리고 원세개는 황제가 되려는 공작을 꾸몄다. 1915년 12월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원세개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제제운동이 노골화되자 중화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토원군을 일으켰으며, 운남에서는 채악, 당계요가 독립을 선포하고 호국군(護國軍)을 일으켰다. 그리고 원세개의 편에 섰던 사람들마저도 호국전에 참가하여, 전국적으로 반원운동이 확대되고 각각 중앙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포하였다. 이를 ‘제3차 혁명’이라 부르며, 또한 ‘반제제 운동’이라고 부른다. 결국 원세개는 제재를 취소하고 총통 자리만이라도 보전하려 하였으나, 호국군이 계속 하야를 요구하여 그는 실의 속에 화병으로 죽었다. 따라서 부총통인 여원홍이 총통직을 승계하였고, 또 독립을 선포하였던 각 성도 이를 취소하여 전국은 재차 통일되었다.
참고 자료
신승하, 『중국 근대사』, 대명출판사, 2004.
신승하, 『중국사』, 대한교과서, 1998.
소도진치, 『중국근현대사』, 지식산업사, 2009 유천순, 「신해혁명여중국근대화 (辛亥革命與中國近代化)」, 한국외국어대학교, 1993.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세운 신해혁명(辛亥革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