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조사와 그 실패에 대한 원인 규명, 한계성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1) 국채보상운동의 정의
2) 국채보상운동이 발단하게 된 경제 배경
3)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4)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Ⅲ. 국채보상운동의 한계
1) 국가 경제의 파탄
2) 당시 국민들의 낮은 경제 수준
3) 담뱃값으로 빚을 갚는데 따르는 현실적 어려움
4) 당시 지식인들과 언론의 한계성
5) 불투명한 국가 경제의 회생 가능성
Ⅳ.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876년 일본의 무력시위에 의해 체결된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을 통해 서구적 문물을 적극 수용하며 이룩한 근대화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지배 야욕을 내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단계가 경제적인 압박이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침탈이 시작되어, 각종 이권을 차지하려는 의도 하에 차관을 공여하기도 하였다. 일본이 한국과 조약을 맺자, 서구 열강들 또한 각종 불평등한 조약을 내걸었으며, 한국의 영토 안에서 벌어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인해 한국의 경제상황은 파탄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식민지배 야욕은 점차 거세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위기 상황 속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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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 이후 제국주의 국가들은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본격화하였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세계열강들은 각종 이권과 자원 침탈을 계속하였다. 1895년 미국은 평북 운산 금광 채굴권을 획득하였고 1896년 고종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받았다. 프랑스 역시 같은 해에 경의철도 부설권을 받았으며 1901년 평북 창성 금광 채굴권, 1903년 평양 무연탄 광산 채굴권을 획득하였다. 1898년 영국은 평남 은산 금광 채굴권, 러시아는 1896년 함북 경원·종성 금광 채굴권과 1896년 압록강 유역·울릉도 삼림 채벌권 등을 갖게 되었다. 이처럼 이 시기 철도 부설권과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등 우리의 이권은 많은 열강들에 손으로 이 넘어갔다.
특히 일본은 1898년 경부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미국이 따낸 철도부설권도 이양 받아 수탈 물자의 수송에 이용하고 1899년 일부 개통하였다. 1900년에는 충남 직산 금광채굴권을 획득하고 1901년 경기도 연해 어업권, 독점적 인삼 수출권 등을 가져갔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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