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교육제도, 과거제도, 조선사회와 문화
- 최초 등록일
- 2014.07.02
- 최종 저작일
- 20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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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교육제도와 과거제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주로 조선 초기 제도가 정비될 시기를 중점으로 정리된 내용입니다.
A+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I. 서론
Ⅱ. 본론
1. 교육제도
1) 관학
2) 사학
2. 과거제도
1) 과거제의 정비와 운영
2) 과거의 종류
Ⅲ. 결론
본문내용
조선의 학교교육은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따라서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과거시험의 준비과정에 불과하였다. 교육내용 역시 과거 준비를 위한 4서·5경 등의 유학에 치중하였다. 과거는 양반지배층을 관료로 채용하기 위한 선발시험이었다. 조선의 과거제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시되었다. 이때에도 음서제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 대상을 2품 이상의 관리 자제로 제한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과거의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고려의 귀족 사회가 조선시대에 관료제 사회로 전환하였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였다.
<중 략>
1) 관학(官學)
(1)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의 명칭은 국학(國學)·태학(太學)·반궁(泮宮)·현관(賢關)·근관(芹官)이라고도 하였다.
성균관은 문과시험을 준비하는 조선왕조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관학의 최고학부였기 때문에 유생들이 학습·기숙하는 모든 비용은 국가에서 지급하게 되어 있었다. 이점은 사학·종학·향교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고려 말 이후의 성균관은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지배사상인 주자학 이념보급의 근거지로서의 기능이요, 다른 하나는 국가의 관료를 양성하는 관료양성소로서의 기능이다. 충렬왕 30년(1304)에 성균감에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두고, 주자학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공민왕 16년(1367)에는 숭문관의 옛터에 불타버린 성균관을 중창하고 성균관 교육을 강화하였다. 또한 성균관은 교육기능 이외에도 유교이념의 전당으로서 학통과 학문의 방향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선현을 문묘에 종사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유교가 국가의 지배사상이 되자 성균관은 ‘明人倫 成人才’의 사명을 띠고 태조 7년(1398)에 국도 건설의 일부로 지금의 성균관대학교가 있는 숭교방에 명륜당·문묘·동서재·정록청·양현고·식당 등 96칸에 이르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연산군 때에 성균관이 왕의 宴樂 장소로 바뀌어 교육기능을 잃었다가 중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문묘를 중수하고 교육기능을 그 전처럼 복구시키고 명나라의 예에 따라 문묘묘정비를 세웠다.
참고 자료
변태섭, 『한국사통론(4정판)』, 삼영사, 20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23』, 탐구당, 2003
이성무, 『한국 과거제도사』, 민음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