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대외관계
- 최초 등록일
- 2014.06.14
- 최종 저작일
- 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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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말~ 조선전기로 이어지는 조선과 주변국과의 대외관계를 엮어보았습니다.
목차
1) 서론
2) 고려 말 대명정책
3) 조선의 개국과 명나라 관계
4) 사대외교
5) 사절단 구성
6) 명나라 사신
7) 무역의 형태
8) 품목(品目)
9) 여진과의 대외관계
10) 일본과의 대외관계
11) 왜구대책
12) 조, 일 문물교류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선 전기 대외정책의 키위드는 ‘사대교린(事大交隣)’이다. 사대가 형식적인 면도 있었지만 주종적인 것이었다면, 교린이란 이웃 나라와 교섭한다는 대등한 관계임을 뜻한다. 즉, 사대는 중국에 대한 외교정책이고, 교린은 왜국(倭國) 및 여진(女眞)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事大),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交隣)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다. 초기의 대명정책은 정도전의 요동 수복 추진으로 인해 잠시 대립관계를 가지다가 태종 이후 관계는 사대(事大)관계를 유지하여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추구하고자 노력하였다. 대여진 정책으로는 강경책을 펼쳐 세종 때 김종서 등으로 하여금 4군6진을 개척함으로써 사민정책 및 토관제를 실시한다. 또한, 회유책으로 토지, 관직을 주어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였다. 대일본에 대한 정책으로는 초기 이종무의 대마도정벌로 강경책을 펼쳤으며, 한편 왜인들이 부산포, 제포(薺浦), 염포(鹽浦)등지에 와서 살려고 하였으므로 허락해 주었다. 조선에서는 통신사를 파견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을 계기로 단절되었다가 에도막부(江戶幕府)시기 다시 회복되었다. 이러한 조선전기 대외관계를 좀 더 자세한 사건 위주로 알아보고자 한다.
<중 략>
조선에서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에는 정례사행(正例使行)이외에도 여러 명목의 비정기적인 사행이 있었다. 조선에서 발생한 중요한 일을 명나라에 보고한다거나 해명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절단을 주문사(奏聞使) 또는 계품사(計稟使)라고 하였다. 또 나라에 특별한 일이 생겨 명나라에 주청을 하기 위한 사신을 주청사(奏請使), 조선의 요청이 받아들여졌거나 혹은 황제에게 감사할 일이 있을 때 보내는 사신을 사은사(謝恩使)라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황제가 보위에 오르거나 태자 책봉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을 진하사(進賀使)라고 하였고, 황제나 황후의 상사(喪事)가 있을 때는 진위사(陳慰使)와 진향사(進香使)를 보내 조문하였다. 조선의 국왕이나 왕비가 서거하게 되면 고부사(告訃使)를 보내 이를 알렸으며, 황제가 지방을 순행하거나 원정길에 나설 때는 흠문기거사(欽問起居使)를 문안차 파견하기도 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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