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 철저히 분석해 A+ 받은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사마천과 사기
1) 사마천(司馬遷)은 누구인가
2) 사기(史記)란
3) 사기의 저술 동기
Ⅱ. 기전체
1) 본기(本紀)
ⅰ) 의미와 구성 및 특징
ⅱ) 사마천의 역사관과 서술특징을 보여주는 사례 ‘항우본기’
2) 서(書)
ⅰ) 의미와 구성 및 특징
ⅱ) 사마천의 ‘하거서’와 ‘평준서’
ⅲ) 서(書)의 변화
3) 세가(世家)
ⅰ) 의미와 구성 및 특징
ⅱ) 사마천의 역사관을 보여주는 사례 ‘진섭세가’
ⅲ) 이후 정사에서 세가 삭제
4) 표(表)
ⅰ) 표의 의미와 구성 및 특징
ⅱ) 진초지제월표
5) 열전(列傳)
ⅰ) 열전의 의미와 구성 및 특징
ⅱ) 백이열전
Ⅲ. 사기(史記)로 알아본 서술상 특징
1) 춘추필법 (春秋筆法) - 포폄
2) 태사공 (太史公) 왈
3) 호견법 (互見法)
Ⅳ. 사기(史記)에 드러난 사마천의 사상
1) 사기의 역사관
2) 사기의 정치관
3) 사기의 경제관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마천은 BC 140~110년경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사령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관직으로 봉선의식의 날짜를 지정하는 등의 일 수행했다. 사마천은 사마담으로부터 역사책 짓는 일을 부탁 받아 BC 91년 경 사기 편찬을 완료하였다.
사기의 본명은 태사공서로, 여기서 태사공은 사마담과 사마천 모두를 지칭한다. 반고에 의하여 태사공서, 태사공기 등으로 불려지다가 삼국시대를 지나 위진시대부터 사기로 불려졌다. 당시는 종이와 인쇄술 발달 전으로 책을 저술 했을 때 베끼기가 상당히 어려웠음으로 오늘날 우리나 보는 사기는 완전하지 않다고 봐야한다. 진나라의 분서갱유 이후 사기 편찬에 어려움을 느낀 사마천은 민간에 흩어져있는 전설, 문헌자료를 수집하며 직접 발로 뛰어 자료를 만들었다.
3)저술 동기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한 동기는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춘추(春秋)의 계승이다. 왕도와 예약을 정리하여 후대에 물려준 공자를 받들어 새로이 흥한 한나라의 사문 역시 기록해야 한다는 아버지 사마담의 유지를 받든 것이다. 두 번째로는 태사령(太史令)으로서의 직분을 지키기 위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구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제시하는 것" 이라는 태사령으로서의 본분에 긍지를 가지고 따르고자 했다.
<중 략>
'호견법'이란 같은 인물이나 같은 사건을 여러 곳에 분산시켜 기록하는 수법이다. '호견'이란 같은 인물 혹은 같은 사건이 이곳에도 보이고 저곳에도 보인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기록을 특정한 체제 한곳에만 집중시키지 않고 체제 곳곳에다 분산시키는 서술 방법을 창조했다. 예를 들어 한 역사인물의 사적을 본인의 전기에서 생략하고 다른 역사인물의 전기 속에 써 넣는 방법이다. 이것을 호견법이라 한다. 사기를 자세히 읽지 않으면 내용이 분산되어 모순된다고 인지하기 쉽다. 따라서 호견법으로 인해 사기를 읽기 힘든 책이라고 해 ‘난서’라고도 한다.
참고 자료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사마천 지음 김영수 평역, 『사기 완역본』, 2013
사마천 지음 김병총 평역, 『사마천의 완역 사기 7』, 집문당, 1994, p.223~238
사마천 지음 김병총 평역, 『사마천의 완역 사기 9』, 집문당, 1994, p.77~122, 123~174
사마천 지음 김병총 평역,『사마천의 완역 사기 10』,집문당, 1994, p.195~206, 207~238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 열전 下』, 을유문화사, 2002, p.689
고종문,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비교
이인호, 「문사철론, 사기백이열전」,중국어문논총 제24집(2003)
이한조, 「백이와 사마천 : 사기총서로서의 백이열전」, 대동문화연구 8(1971)
방호범, 「사마천의 역사인식과 철학사상」, journal of human studies vol23(2009)
유강하, 「태사공자서와 보임안서를 중심으로」, 문한치료연구 제28집(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