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와 문화- 경복궁 답사
- 최초 등록일
- 2014.05.06
- 최종 저작일
- 20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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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태조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한 다음 즉위 3년(1394)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경복궁을 짓기 시작하여, 그 다음해에 경복궁을 완성하였다. 이때의 경복궁 규모는 390여 칸으로 왕궁으로서는 소박한 편이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에 나오는"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경복(景福)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겨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다시 옮겨 정궁으로 이용하였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를 지었는데, 연못을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이때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는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을 세웠다. 또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1553년(명종 8) 강녕전에서 불이나 강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이듬해 강녕전과 교태전·연생전·흠경각·사정전을 복구하였다.
<중 략>
설레는 마음으로 표를 끊고 들어가서 제일 먼저 보였던 근정전의 모습이다. 경복궁은 원래 크게 왕이 통치하는 공간,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공간, 신하들의 공간 세가지로 나뉘어 진다고 한다. 근정전은 이중에서 왕이 통치하는 공간에 해당한다. 궁궐 내에서 가장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답게 웅장한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근정전은 국가와 왕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 화려한 모습을 띄고 있다. 나는 기둥 장식이 제일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근정전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근정전의 바닥에 있다. 근정전은 분명 예식을 치루는 장소인데 바닥이 울퉁불퉁했다. 이 비밀에서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했다. 관료들은 이 곳에 설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햇빛이 바닥에 반사되어 그들의 얼굴에 닿으면 덥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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