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 은율탈춤
- 최초 등록일
- 2003.06.10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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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터넷에 있는 글들을 정말 정확하고 유기성있게
적었습니다.
서론 부분이 백미입니다
목차
시작하며
은율탈춤의 개요
은율탈춤의 역사적배경
은율탈춤의 특징
은율탈춤의 내용
배경
본문내용
시작하며
저는 인천광역시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향토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상들의 얼을 지키고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전수하는 것은 현재를 사는 우리의 의무이며 조상들의 얼을 배우는 것은 내가 현재를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고장의 유·무형 문화재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하여 시청에서 발행하는 간행물을 모아서 읽어오며 매년마다 향토 사례 발표 대회에 참가하였습니다. 시청에서 발행하는 간행물을 읽다가 저는 우리 고장 인천에는 탈춤놀이가 발생되지는 않았으나 6·25 떄 월남한 사람들의 영향으로 황해도 은율탈춤이 전수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변미혜 교수님의 '한국음악의 이해' 수업 과제를 하기 위해 여러 탈춤에 대해 미리 알아보다가 제 초등학교때 기억이 떠올라서 은율탈춤에 대해 조사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은율탈춤의 개요
은율탈춤은 원래 황해도 은율군 은율 소읍에서 전승되어 온 가면극이다. 6·25 때 월남한 놀이꾼들에 의해 남한에서 놀이가 복원되어 인천광역시 남구 수봉공원 내에 전수회관을 두고 있으며,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되었다. 내용은 다른 탈놀이와 마찬가지로 반주음악에 춤과 몸짓, 재담(才談)과 노래를 섞어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과 조롱, 일부처첩(一夫妻妾)의 가정파탄을 담았다.
은율탈춤의 역사적배경
은율탈춤의 유래나 성립연대를 고증할 만한 기록이나 자료는 없지만, 19세기경에는 놀이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해도 서쪽 평야지대의 중심지였던 은율은 쌀, 사과, 참외 등의 농사와 서해의 어물이 비교적 풍부한 지역이었는데, 인구의 증가와 상업의 번창에 따라 차차 소도시적인 분위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탈놀이패를 지원하는 후원자들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놀이를 위해서는 액수에 관계없이 지원해 주었으며, 개중에 살림이 넉넉한 사람은 거액을 희사하기도 했다. 놀이꾼들은 놀이에 참여함으로써 음식이나 술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으며, 상인들은 단오놀이에 모여든 인근 사람들에게 평소보다 물건을 많이 팔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