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세사] 정인보의 역사관에 대해

등록일 2003.06.09 한글 (hwp) | 4페이지 | 가격 400원

소개글

양적인 면으로는 좀 부족한 면이 있지만, 질적인 면으로만 살펴보면 어디에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것임을 자부합니다. 서론과 결론을 좀더 보강만 한다면 양적인 면으로도 부족함이 없을꺼에여... 마니 받으시고 조은 점수 받으세여.....

목차

없음

본문내용

1. 생 애

위당(爲堂) 정인보는 1893년 5월 6일에 외가인 서울 종현(鐘峴)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업(經業)이고 호는 수파(守坡)·미소산인(薇蘇山人)·담원( 園) 등이 있었는데 아호가 위당이었다.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이 되며 아버지인 정은조(鄭誾朝)는 호조참판을 지냈다. 그러나 한말 격변기의 시대상황에서 가세가 크게 기울어졌고 위당은 안정된 생활여건 속에서 성장하지 못했다. 위당은 소년시절부터 한학에 몰두하였는데 1910년에 양명학의 대가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의 제자가 되어 학문영역을 더욱 확장시키고 훗날 구경(九經)·십통(十通)에 통달하게 되는 학문적 기초를 이루게 된다. 위당은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긴 직후 중국상해와 만주 서간도를 오가면서 국제정세를 살폈고, 상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동포들에 대한 정치·문화적 계몽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후 위당은 1923년 이래 연희전문에서 전임으로 재직하면서 한문학,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의를 담당하였고 본격적인 저술활동과 함께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한다. 해방 후 1948년 국학대학의 학장에 취임하였고,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초대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말경 서울에서 납북되었다.

2. 역사학의 체계와 역사인식

(1) 역사학의 체계

위당의 한국사연구의 계기와 지향점은 일제 식민사관에 대한 철저한 대응과 일제의 논리에 부응해간 일부 실증주의 사관의 시정 및 민족주의 사관의 계승에 있었다. 이의 연장으로 위당은“사람의 고도리는 얼이다. 얼이 빠져버렸을진대 그 사람은 꺼풀 사람이다.”라고 하여 정신사관으로서의‘얼’을 강조하였다.

참고 자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인식
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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