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금석학] 광개토왕비문분석

등록일 2003.06.08 한글 (hwp) | 26페이지 | 가격 1,000원

소개글

광개토대왕비에 대해서 모든 해석과 분석을 담와놓았으며 해석
하기 힘든 부분이나 약간 이치에 안맞는 부분들은 조금 더 자
세히 분석하여 서술해놓았습니다
필요하신분은 받아가셔셔 잘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

비문 전 문장의 번역 및 해석... 주석 첨가
비문의 문장에 대한 고찰
마무리

본문내용

1) 본 신묘년 기사에 나타난 전적(戰績)은 광개토왕이 아닌 고국양왕의 치적이다.

신묘년(391년)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해이다. 비문의 순서가 연대기(年代記)적으로 되어있음을 고려할 때, 만일 당시 신묘년의 신라복속과 백제 격파가 광개토왕의 치적(治績)으로 이해되었다면 이는 당연히 을미년(395년)의 기사보다 앞부분에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문상 신묘년 기사가 을미년 기사의 다음 부분에, 병오년 기사의 배경 설명을 위하여 기록된 것을 볼 때 신묘년의 백제 공략과 신라 복속은 광개토왕이 아닌 고국양왕의 치적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삼국사기 백제조를 보면 고국양왕 8년 신묘년(391년)에 이미 고구려가 말갈군을 동원하여 백제 적현성을 공략했으며 이어 계속된 백제 공략으로 임진년(392년) 7월 까지 백제 10성을 탈취하고 10월 관미성을 함락시킴으로서 백제 공략이 일단락되었다. 광개토왕이 그해 5월 18세로 즉위했을 당시에는 이미 백제 공략이 한참 진행중이었던 만큼 비록 광개토왕이 그 마무리 과정에서 상당한 공헌을 했다고 하더라도 백제 공략의 궁극적 성과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로 돌려졌을 것이다.
또한 신라가 고구려에 복속하게 된 경위를 보면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은 고국양왕이며 그해 7월 고국양왕이 죽은 뒤 실성왕자가 고구려로 옴으로서 신라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신묘년의 백제공략과 신라 복속은 고국양왕이 시작하고 광개토왕이 마무리한 일이며 본 비문을 작성할 당시에 이 두가지 공적은 고국양왕의 치적이라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또다른 증거로서 광개토왕의 수묘인 선발을 들수 있겠는데, 광개토왕은 자기가 직접 확장한 영토의 백성들로 수묘인을 삼았으나 유독 매우 어렵게 빼앗은 백제의 관미성(關彌城, 혹은 閣彌城)에서는 수묘인을 선발하지 않았다. 이 것은 관미성 확보등이 광개토왕의 업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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