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시티 이벤트
  • LF몰 이벤트
  • 캠퍼스북
  • 서울좀비 이벤트
  • 탑툰 이벤트
  • 닥터피엘 이벤트
  • 아이템베이 이벤트
  • 아이템매니아 이벤트

신채호를 말하다

*경*
최초 등록일
2014.03.31
최종 저작일
2013.05
9페이지/한글파일 한컴오피스
가격 1,000원 할인쿠폰받기
다운로드
장바구니

목차

1.생애

2.활동
1) 계몽운동기
2) 망명활동기
3) 임시정부 활동기
4)무정부주의 활동기
5) 역사연구 연구업적

3. 결론

본문내용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세종때의 학자인 신숙주의 후손이다. 어릴 때는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잇기 조차 어려웠지만 신채호는 글읽기를 즐겨 하였다. 군(현재 대전광여기 대덕구) 산내면 어남리 도림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신채호는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를 따라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청원군 남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와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3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칠 수 있었고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았다.

- 학문연구
그의 할아버지는 신채호를 충청남도 목천에 있는 자신의 친구였으며 구한말 관료였던 신기선에게 소개하여 그곳에 있던 장서를 읽게 하였다. 신채호는 신기선의 추천을 받아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한학을 열심히 공부하여 20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고, 22세에 고향으로 내려와 문동 학원에서 강사로 활동한다. 이어 25세 때에는 산동학원을 세우고 신교육 운동을 벌였다.

- 언론활동
그는 개신유학자들과 함께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였다가 해산될 때에 잠시 체포되었다. 만민공동회는 1898년 열강의 이권침탈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개최되었던 민중대회이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 신채호는 관직의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이듬에 해는 <대한매일신문> 주필(논설위원) 이 되어 논설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고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며 항일 언론 운동을 펼쳤다. 이때 시일야방성대곡 사건이 일어나자, 황상선문은 통감부에 의해 폐간되고 신채호는 외국인 베델이 운영하던 대한매일신보로 옮기어 논설기자로 활동한다. 1907년 신채호는 안창호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 단체 신민회를 만들었고, 신문의 논설을 통하여 국채 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10년 4월까지 대한매일신보에서 근무하며 많은 논설을 집필하면서 그는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여러 차례 주장했었다.

참고 자료

없음

이 자료와 함께 구매한 자료

*경*
판매자 유형Bronze개인

주의사항

저작권 자료의 정보 및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해피캠퍼스는 보증하지 않으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자료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 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의 저작권침해 신고센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환불정책

해피캠퍼스는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가 만족하는 서비스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아래의 4가지 자료환불 조건을 꼭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파일오류 중복자료 저작권 없음 설명과 실제 내용 불일치
파일의 다운로드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파일형식에 맞는 프로그램으로 정상 작동하지 않는 경우 다른 자료와 70% 이상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 (중복임을 확인할 수 있는 근거 필요함) 인터넷의 다른 사이트, 연구기관, 학교, 서적 등의 자료를 도용한 경우 자료의 설명과 실제 자료의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런 노하우도 있어요!더보기

찾던 자료가 아닌가요?아래 자료들 중 찾던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보세요

더보기
최근 본 자료더보기
탑툰 이벤트
신채호를 말하다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
  • 레이어 팝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