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연암의 생애의 특징적 면모
2 문체반정(文體反正)
3 연암 한문전(漢文典)의 실학사상과 문학사적 의의
4 연암의 문학관
5 연암 작품의 특징
6 연암 소설에 드러난 비판의식
본문내용
연암이 비판적인 면모를 지니게 된 이유는 그의 생애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연암은 두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한참 재롱을 부릴 나이에 아버지 없이 자라는 손자를 불쌍히 여긴 할아버지는 공부는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 때문에 연암은 열여섯 살에 장가를 들고 나서야 홍문관 교리였던 처삼촌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때 연암은 주자학뿐만 아니라 군사, 농업, 천문, 지리도 배운다. 연암이 어려서부터 그 때의 평범한 양반들처럼 주자학만을 배웠다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아 집안이 여전히 높은 벼슬을 하고 유복했다면 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하는 비판적 지식인으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연암은 만년에 병환 중에도 불구하고 큰 붓으로 ‘인순고식, 구차미봉(因循姑息,, 苟且彌縫’)이라는 여덟 글자를 병풍에 쓰고는 “천하만사가 이 여덟 글자로부터 잘못된다.”고 했다. 낡은 인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차스럽게 적당히 임시방편으로 땜질하는 것을 못 견디게 싫어했던 것이다. 생활에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면 관행에 따르거나 임시방편에 의존하지 않고 근본적으로 원리를 따져 바르게 고쳐나가는 것이 연암의 평소 생활 모습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여유로운 자세로 우스갯소리를 하며 문제 상황을 풀어갔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를 야기하지 않았다.
연암의 그러한 면모를 보고, 송원(松園) 김이도는 “연암처럼 매서운 기상과 준엄한 성격을 가지 사람이 만일 우스갯소리를 해대며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 세상은 위태로움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야.”라고 했다.
특히 연암은 우리나라의 학문이 이용후생(利用厚生學)과, 경세제국학(經世濟國學), 명물도수학(名物度數學)을 소홀히 하여 잘못들 답습하려는 것을 개혁하려고 했던 바, 젊은 시절부터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어울려 실용적 도구와 제도 문제를 담론하고 연구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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